한참 부족한 글을 당선시켜 주심은 용기 잃지 말고 꾸준히 습작하라는 엄중한 명령 이리라.세상에서 길을 잃었다. 난파된 배에 몸을 맡기고 표류한 지 정확히 10년이다. 과거의 상처를 끌어안고 여생을 지내기에는 너무 억울하고 허무했다. 존재감을 찾기 위해 시작한 글쓰기이다. 글을 쓰면서 만신창이 된 몸과 마음이 조금씩 치유되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도 성취욕이 터를 잡았다. 한 편의 수필을 완성키 위해 읽고 쓰기를 반복하면서 적절한 어휘를 찾으려 분주히 공부하고 심중에 숨어있는 소재를 끄집어내려고 몸가짐을 바로 하려 애썼다. 신앙보다 간
아내는 갓 길을 걷다가 뒤쪽에서 달려온 승용차에 부딪쳐 머리를 다쳤다. 몸체가 차 본냇에 얹혀 뒷머리가 차 앞 유리에 충돌했다. 유리가 완전히 깨어졌다. 땅바닥에 떨어진 아내는 머리에서 많은 피를 흘렸다. 머리 뿐 아니라 갈비뼈, 발목뼈 등 온몸이 부셔졌다. 헬기로 병원에 후송되었다. 석 달이 넘는 투병생활에 지친 아내는 설날 전에 집으로 가서 치료하기를 주장했다.아내는 요양 중인데 이번에는 내가 머리를 다쳤다. 문인협회 사무실을 문학관내 다른 위치로 옮기기로 했다. 집기들이 많았다. 1톤 트럭에 냉장고를 실으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등산은 왜 하는가’ 하는 화제가 친구 사이에 오른 적 있는데, 누가 선뜻 ‘산이 거기 있기에’라는 힐러리 경 말을 꺼냈다. 그래 ‘그 말은 멋만 부렸지, 좀 애매한 이야기 아닌가’ 하고 반문했더니, 멋진 대답 둘이 나왔다. ‘고마 간다’. ‘꽃 보러 간다’란 대답이다. ‘고마’란 경상도 사투리로 그냥 아무 뜻 없이 간다는 말이고, 꽃 보러 간다는 것은 순전히 웃으개 소리다. 꽃이 무엇인가. 해어화(解語花), 즉 등산 오는 여인 보러 간다는 것이다.노년의 취미로는 불경 혹은 성경을 읽거나, 꽃나무를 키우거나, 필묵(筆墨)으로 한시를
너뱅이들 두말가웃지기 논배미를 쟁기질하는 아버지의 새참을 나르는 일은 나의 몫이었다. 큰길가 주막에서 막걸리 한 되를 받아 들로 향했다. 젓가락은 주전자 주둥이에서 딸랑거리며 나를 따랐고 김치 나부랭이 담긴 접시에선 곰삭은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경지정리를 하기 전의 논두렁은 다만 논과 논 사이를 경계 짓는 것에 불과해 마치 실뱀처럼 좁고, 구불구불했다. 본래 논두렁은 두 사람이 비켜 갈 정도는 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식구가 늘고 사는 것이 팍팍해지자 모 한 포기라도 더 꽂을 요량으로 논은 두렁을 야금야금 먹어들어갔는지도 모를 일이
“비티민D 수치가 현저히 낮아서 약을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라는 의사의 말에 나는 손사래를 치며 햇볕 많이 쬐겠다는 약속을 하고 돌아왔다. 시절이 하 수상하니 자발적 금족령에 갇혀 사는 터라 햇볕 쬘 일이 없어서인지 거울 앞에 서면 낯빛은 허여멀건 하고 어느새 뼈 건강까지 걱정해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바람 한 점 없이 하늘 드높은 날, 부러 창문을 열고 햇볕샤워를 즐기고 있는 중 당선 소식을 접했다. 안쓰러워 오래 끌어안고 있던 글이었다. 막걸리를 빚듯 오래 다듬고 다듬은 글 한 편이 내게서 뒷모습을 보이며 떠나고 있었다. 올가을
글을 쓴다는 건 명상이나 참선하는 것과 같은 것인지 모른다. 허공으로 사라지는 생각의 궤적을 따라서 조용히 자신의 마음에 귀 기울여 자각을 이루어 낸다는 면에서 그렇다. 참선할 때는 한가하고 고요한 곳에서 결가부좌를 하지만, 수필을 쓸 경우는 그럴 필요는 없다. 이른 아침 시간에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 두드리면서 생각의 오솔길은 산책하면 된다.글을 쓴다는 건 곧 참 나를 밝히는 작업이고, 티끌 세상에 물들지 않는 본래 청정무구를 추구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조사들의 화두(話頭)는 ‘이 뭣고?(是甚)’,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
찔끔거리던 비가 걷들자 가판대 가장자리에 햇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민수는 천막 안쪽으로 의자를 조금 들여놓고 앉는다. 도로는 마냥 한산해서 자꾸 가물거리는 눈을 부릅뜨며 졸음을 쫓아본다. 검정색 승합차 한 대가 멀찍이서 달려온다. 민수가 도로가로 뛰어간다. 승합차를 향해 찐 옥수수 두 개가 든 비닐봉지를 흔든다. 조수석에 앉은 장난감 물총을 든 사내아이와 눈이 마주친다. 웃고 떠드는 표정이 물놀이의 여흥이 남아있는 듯하다. 사내아이는 창문을 살짝 내리고 물총 구멍을 겨눈다. 민수는 몸을 움찔하며 몇 발짝 물러난다. 기어이 한줄기의
수원 사는 작가친구의 작업실에 들른 날입니다. 장안성을 산책하다가 시장기가 돌아 후미진 골목에서 만난 중국음식점으로 들어갔습니다. 주문이 들어가자마자 주방에서 요란한 칼질 소리가 들리더니 금방 음식이 나왔습니다. 고추기름이 동동거리는 짬뽕 한 그릇에 가지각색의 해산물이 들어있더군요. 국물 한 숟가락에 입맛을 다시고는 한 그릇을 말끔히 비웠습니다. 다음날 수상소식을 접했습니다. 그때 왜 그 짬뽕 한 그릇이 떠오르는지요.7년 동안 동화를 쓰고 수필을 쓰고 여행기도 썼습니다. 1년 전부터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촌스럽고 거친 문장으
푸른 도마뱀이 날마다 허물을 벗는제주 바다에 저녁노을 몇 점이 앉아있다.평생 바다의 뿌리를 캐고 껍질을 벗기며더러는 물안경에 서린 세월을 꺼내 닦는다.햇살처럼 손끝에 머문 자식을 어루만질 때,익숙한 손놀림에도 팅 하고 튕겨 나가는 햇살 한 움큼이제 기다림과 그리움마저도 더는 자라지 않는다.자고 나면 몇 겹의 물굽이가 수만 개의 푸른 날을 세우고파도의 거센 힘줄로 옭아 매인 할망* 해녀의 삶은 고단하다.구멍새 숭숭한 삶, 살갗마저 현무암 닮아가는 거칠어진 노년은나날이 썰물 지고 굽어져 가는 허리만 맥없이 두드려본다.오래된 습관처럼 어
그녀는 반지하에 살고 있다장마철이면 상형문자의 곰팡이가우울의 문장을 쓴다냄새가 몸에 끈적끈적 들러붙어도무더위에는 반지하가 최고라고 위로한다창살 사이로 햇살은 벽의 반을데우다가 힘없이 사라진다그녀의 목소리는 세상에 온전히 닿지 않고계단은 반만 밝은 사각지대다지상을 향한 계단은 위에 있는 자들의몫이라고 체념하다가도 눈과 귀는창을 두드리며 대화를 시도한다그녀가 사는 공간은 어둡고 퀴퀴한냄새로 얼룩져 있다지금도 그녀는 반지하 계단을 오르고 있다조금만 더 오르면 일 층이라고온전한 봄 햇살을 받을 수 있다고누구에게는 평범한 시작이생의 끝날까지
햇볕도 추위를 피해 걸어 내려오는 지하도 계단한줌 한 줌 쌓아올린 탑 가뭇없이 사라진 자리벽도 기둥도 없이쓰러질 듯 폐박스 구들에 웅크린 암자 한 채깨달음 얻기 위한 출가인가다 비운 생의 자세로 엎드린 고행비린 세월도 선나禪那*에 들고따로 품어야할 화두도 없다탁발托鉢에 나선 소쿠리 한 권 불경처럼 모셔도아무도 읽고 지나는 이 없고동전 한 닢 떨어지는 소리 간절한 번뇌칼바람에 시리다죽비의 눈초리보다 따가운 사람의 시선에도열반에 든 듯 눈 길 한 번 흩어짐 없이수심愁心 깊은 고해에 몸 담근 행려가 된 묵언정진세상을 깨우는 울림 우렁차다
가상 사운드 뮤직실, 천장에서 내려온 줄과 바닥의 종이 상자, 연결된 암호들이 음표를 만들며 내통하고 있다. 가느다란 줄이 얇게 바르르 떨면 상자의 입술이 음표를 만들어 낸다. 빗소리라는 문자를 눈에 담고 천천히 마음을 비우고 눈을 감으면 부드러운 강바람 불어오고 콩나물 꼬리 같은 사분음표로 내 귀를 간질이다가 음향은 점점 커지는데 처음에는 빗소리 바람 소리 그사이에 시든 꽃이 떨어지고 수십만 개의 소고 소리 점점 크게 울리는데 큰북을 치며 빗속에 젖어 든다. 내가 운다. 빗속에 젖어 울고 있는 나, 회오리바람을 가르며 하늘로 오르
높아만 가는 가을 하늘을 보며 이렇게 빼앗긴 가을은 언제 찾아 쓸 수 있는 건지 코로나 일구에게 묻던 날 곱게 익은 단풍보다 더 반가운 문자 한 통, 당선 소식할 말은 늘어 가는데 들어주는 이는 자꾸 멀어지고 혼자서 앓는 날이 늘어갔습니다. 그때 그 옹알이 시가 되어 오늘 환한 빛으로 행복합니다. 이제 시는 나의 중요한 일상이 된 내 마음의 잡념을 쓸어내 준 은인입니다. 잡힐 듯 잡히지 않은 문장으로 앓던 밤은 적막했지만 그런 시간들이 모여 살이 되고 피가 되어 한 생을 완성한다는 것을 시가 있어 알아가고 있습니다. 늘그막에 걸어보
나뭇잎이 노랗게 변해가는 것을 바라보다가 핸드폰 메시지 음이 울려 무심히 열어보았습니다. 당선을 알리는 내용이었습니다. 몇 번을 확인했습니다. 그 순간 물들어가는 가을날이 너무도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나이가 들어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살아가는 이유를 찾은 것처럼 행복했습니다. 사춘기 시절부터 끄적거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말이 없었던 저는 지금도 말보다는 글로 표현하는 것이 편합니다. 그렇게 쓰기 시작한 시는 제 생활의 일부가 되었고, 활력이 되었습니다.생활 속에서
누구나 살다 보면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장면처럼 삶의 고비가 있고 힘든 오르막길이 있지요. 우리 대다수는 평범하고 그저 보통 사람들이기에 그 길에서 이정표를 잃은 것처럼 방향 감각을 잃고 갈팡질팡하며 우왕좌왕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곁에 있는 누군가 내 말에 귀 기울여주는 친구로 있다면 큰 위안이 되고 힘이 되지요. 더욱이 위로의 말과 위안이 되는 따스한 손을 내밀어 주면 없던 힘도 나지요. 제게는 바로 가 그랬습니다. 매일 아침저녁에 읽는 시, 쓰는 시가 그랬습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고통과 절망의 순간, 시
날마다 뉴스 보기가 무서울 정도로 세상이 각박하다. 마음대로 외출하기도 어렵고 여행하기는 더 어렵다. 그렇다고 칩거할 수도 없으니 잠시 가까운 곳을 다녀오면서 세상이 참 많이 변해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두 마스크를 쓰고 사람들이 서로를 경계하면서 조심스럽다. 나 역시 같은 마음으로 불편하지만 견뎌야 한다 생각하며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는데 딩동 메시지가 울린다. 2020년 제7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은상에 선정되었다는 소식이다. 날마다 시들하던 생활에 섬처럼 외로워지는데, 나에게는 활기를 더해 주는 반가운 소식이다.요즘 세상이 너무
길은 줄이다. 줄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길이 만남을 만들고 줄이 사람을 만들어 내는 가운데 저마다의 삶에는 갖가지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힌다. 만약 누군가가 옛길을 찾아 간다면 이는 과거의 어느 줄을 만나려는 갈망 때문이다.가늘디가는 정맥 같은 산동네 집들이 골목을 따라 줄처럼 이어져 있다. 곁지기인 그와 나는 은혜를 갚는 까치의 심정으로 골목을 접어들었다. 사십 여 년이 지난 세월이건만 이곳만은 세월도 비켜갔나 보다. 그가 한 하꼬방 앞에 섰다. 집이 주인을 닮는 것일까, 아니면 주인이 집을 닮는 것일까. 사람은 분명
춘양역 플랫폼에 섰다. 나란히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있는 철길과 반세기 만에 조우(遭遇)한다. 만나서는 안 되는 평행선이 저 멀리 소실점으로 만나 사라진 철길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철길 가에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들은 나를 기억이라도 하는 것일까. 바람에 하늘거리는 여린 모습은 그 시절의 내 모습처럼 가냘프기만 하다. 바람이 부는 대로 어쩔 수 없이 흔들려야 했던 젊은 날의 자화상을 코스모스가 불러온다.“뚜~” 기적을 울리며 기차가 서서히 역으로 들어선다. 기적소리는 한순간에 세월을 되돌린다.그날, 남편은 우유병과 기저귀를 챙겨
글을 쓰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그때의 절박한 상황이 다시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제게 글쓰기는 넋두리를 꽃으로 피워내는 작업입니다. 지나온 삶의 자국들이 글로 태어날 때 인생은 향기를 머금고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말로 할 때는 넋두리로 들릴 이야기도 글로 빚어지면 한 송이 꽃이 됩니다.그날 야속하게도 멀어져가던 ‘기적 소리’가 이렇게 긴 시간을 보내고, 다시 행운을 싣고 올 줄이야. 더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글밭을 마련해준 경북일보사에 감사합니다.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도 머리
기쁨보다는 놀라움이 앞섰다. 이렇게 큰 상에 오르게 될 줄이야. 설익은 밥을 올려놓은 듯한 부족함이 마음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는데….글감을 찾던 중이었다. 칠순을 맞이한 남편에게 한 번은 그의 암울했던 성장기를 소환하여 치유해 주고 싶었다. 아린 지난날이 몇 권의 소설감이 될 법도 했던 삶. 차이고 밟히며 겪어낸 생의 격전장에서 잡초처럼 꿋꿋이 버티며 악착같이 살아온 그였다.그 표현이 제대로 되지 않은 낭패감에 못내 마음이 걸리적거린다. 손을 떠난 원고는 언제나 칸을 채우지 못한 아쉬움으로 남게 되나 보다. 그럼에도 할 일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