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애인이 꿈에 나왔다물기 좀 짜 줘요오이지를 베로 싸서 줬더니꼭 눈덩이를 뭉치듯고들고들하게 물기를 짜서 돌려주었다꿈속에서도그런 게 미안했다[감상]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에서 “꿈은 은폐되고 왜곡된 소망이 드러나는 곳이다. 그러므로 꿈의 해석을 통해 무의식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라고 썼다. 이 시에서 화자(話者)는 오이지의 물기를 짜서 돌려주는 헤어진 애인의 꿈을 꾸고는 “꿈속에서도 그런 게 미안했다”라고 고백한다. 베에 싼 오이지 따위도 정성스럽게 “고들고들하게 물기를 짜서” 돌려주는 애인이라면, 그가 어떤 사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지은 지 삼 년밖에 안 된 집을 부득이 헐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지붕을 들어내자 꼬리에 못이 박혀 꼼짝도 할 수 없는 도마뱀 한 마리가 그때까지 살아 있었다. 동료 도마뱀이 그긴 시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먹이를 날라다 주었기 때문이다.[감상] 독자들을 만나면 빠지지 않고 받는 질문이 “시의 소재를 어디서 얻는가?”이다. 내 시의 팔 할은 신문이나 잡지, 책에서 얻는다. ‘좋은 생각’, ‘샘터’ 같은 월간지에서도 많이 얻는다. 나머지는 일상에서 500원짜리 동전 줍듯 가끔
시골 버스 정류장에서할머니와 서양 아저씨가읍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시간이 제멋대로인 버스가한참 후에 왔다- 왔데이!할머니가 말했다할머니 말을 영어인 줄 알고눈이 파란 아저씨가오늘은 월요일이라고 대꾸했다- 먼데이!버스를 보고 뭐냐고 묻는 줄 알고할머니가 친절하게 말했다- 버스데이!오늘이 할머니의 생일이라고 생각한서양 아저씨가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해피 버스데이 투 유!할머니와 아저씨를 태운행복한 버스가힘차게 떠났다[감상] 절묘하다. 할머니의 사투리와 서양 아저씨의 영어가 버스정류장에서 스파크를 일으켜 버스 안에서 “해
여자가 아기의 말랑한 뼈와 살을 통째로 안고산후조리원 정문을 나온다 아직아기의 호흡이 여자의 더운 숨에 그대로 붙어 있다빈틈없는 둘 사이에 끼어든 사내가검지로 아기의 손을 조심스럽게 건드려 본다아기의 잠든 손이 사내의 굵은 손가락을가만히 움켜쥔다[감상] 산후조리원 동기를 ‘조동’이라고 한단다. 학부모 상담할 때도 “그 애 엄마랑 저랑 조동”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여동생은 오래전 ‘조동’과 여전히 언니, 동생처럼 지낸다. 혈연, 지연, 학연보다 ‘조동’의 유대감이 더 끈끈한 것은 아이가 자라면서 겪는 갈등과 고민과 어려움을 긴밀하
주인 없는 개, 라는 말을 들을 때 슬프다.주인이 없어서 슬픈 게 아니라주인이 있다고 믿어져서 슬프다.개의 주인은 개일 뿐인 거지.개와 함께 사는 당신은 개의 친구가 될 수 있을 뿐인 거지.이 개의 주인이 누구냐고요?그야 개, 아닐는지?이 개가 스스로의 주인이 될 수 있게 해주는 사람이라면사랑을 아는 좀 멋진 절친쯤 될 수 있겠소만.[감상] “늘/ 강아지 만지고/ 손을 씻었다// 내일부터는/ 손을 씻고/ 강아지를 만져야지” (「반성」, 함민복) 우리는 ‘천오백만 반려인’ 시대에 살고 있다. 반려동물을 위한 호텔, 스파, 유치원, 돌
‘나는 너, 너는 나우리는 한 몸이란다’설법을 듣고 난 동승이 말했다‘알았어요. 하지만 내가 스님일 때보다스님이 나일 때가 많았으면 좋겠어요’[감상] 여시아문(如是我聞)이란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라는 뜻으로 아난다가 붓다의 가르침을 사실 그대로 전한다는 의미로 경전의 첫머리에 쓰는 불교 용어다. 모든 불교 경전에 ‘여시아문일시부재(如是我聞一時佛在)’가 첫머리로 붙는 까닭이다. 십수 년 전에 절에 갔다가 마음에 담아온 말씀인데 붓다는 이기심과 이타심을 이렇게 설파하셨다. “모든 괴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심에서
일어나긴 했는데잘 때까지 딱히할 일이 없다연상이내 취향인데이제 없어할멈,개한테도 주는 사랑나한테도 좀 주구려[감상] 설 연휴 때 누가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위 시를 낭송했으면 좋겠다. 설 선물로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포레스트북스, 2024) 한 권 사드리면 센스 있다고 칭찬받을 것이다. 이 책은 일본에서 열린 실버 센류(짧은 시) 공모전에서 8년 동안 수상한 작품 중 많은 사랑을 받았던 88편을 엮은 시집이다. 센류란 일본의 정형시 중 하나로 5-7-5의 총 17개의 음으로 된 짧은 시를 말한다. 주로 풍자나 익살이 특징이
늦은 밤,아파트 놀이터에 불빛이 어른거린다.플래시다!으슥한 지하 주차장에도후미진 분리수거장에도플래시다!구석구석 속속들이플래시다!등굣길,아파트 입구에 플래시가 서 있다.“경비원 할아버지, 안녕하세요!”“그래, 은유구나. 학교 잘 다녀오렴.”내 이름을 불러주며플래시가 손을 흔든다.해처럼 달처럼한결같이 우리를 비춰주는플래시다![감상] 인터넷 검색창에 ‘경비원’을 검색하면 ‘올해도 경비원 해고 대란’, ‘반드시 고분고분할 것’, ‘명절마다 상납에 해고까지’, ‘경비원 극단 선택’, ‘아파트 머슴도 아니고’와 같은 기사가 주르륵 뜬다. 동화
산비둘기 두 마리가정다운 마음으로서로 사랑을 하였습니다.그다음은 차마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감상] 요즘 인기 있는 웹툰, 웹소설의 구조는 ‘기승전결(起承轉結)’이 아니라 ‘승전기결(承轉結起)’이다. 다음 이야기를 궁금하게 하는 방법이다. 자소서나 보고서는 ‘결기승전’, 먼저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밝히는 게 대세다. 가수 싸이는 ‘전결전결’ 뮤지션을 꿈꾼다. 다들 배우기는 ‘기승전결’로 배웠지만, 각자 자신만의 호흡과 리듬으로 세상을 향해 스토리텔링을 한다. 옳다. 천상천하유아독존 아닌가. 프랑스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장 콕토는 학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나에게서 그대에게로 가는 편지는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가는 편지와 받아 볼 편지는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그대가 가고 난 뒤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감상] 시인은 산책 중에 우체국과 우체통을 보고 느림과 기다림의 의미를 통찰한다. ‘푸른곰팡이’를 배양하여 항생제 페니실린을 얻듯이 ‘산책’, ‘우체국“, ”편지“, ”우체통
사과를 먹는다사과나무의 일부를 먹는다사과꽃에 눈부시던 햇살을 먹는다사과를 더 푸르게 하던 장맛비를 먹는다사과를 흔들던 소슬바람을 먹는다사과나무를 감싸던 눈송이를 먹는다사과 위를 지나던 벌레의 기억을 먹는다사과나무에서 울던 새소리를 먹는다사과나무 잎새를 먹는다사과를 가꾼 사람의 땀방울을 먹는다사과를 연구한 식물학자의 지식을 먹는다사과나무 집 딸이 바라보던 하늘을 먹는다사과에 수액을 공급하던 사과나무 가지를 먹는다사과나무의 세월, 사과나무 나이테를 먹는다사과를 지탱해온 사과나무 뿌리를 먹는다사과의 씨앗을 먹는다사과나무의 자양분 흙을 먹
내 몸에서 가장 강한 것은 혀한 잎의 혀로참, 좋은 말을 쓴다미소를 한 육백 개나 가지고 싶다는 말네가 웃는 것으로 세상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오늘 죽을 사람처럼 사랑하라는 말내 마음에서 가장 강한 것은 슬픔한줄기의 슬픔으로참, 좋은 말의 힘이 된다바닥이 없다면 하늘도 없다는 말물방울 작지만 큰 그릇 채운다는 말짧은 노래는 후렴이 없다는 말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말한 송이의 말로참, 좋은 말을 꽃 피운다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란 말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는 말옛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꾸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전파가 되었다.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누가 와서 나의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 다오.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우리들은 모두사랑이 되고 싶다.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라디오가 되고 싶다.[감상] 패러디란 특정 작품의 소재나 작가의 문체를 흉내 내어 익살스럽게 표현하는 수법이나 작품을 뜻한다. 다른 노래에 병행하는 노래란 뜻의 그리스어 ‘파로데이아’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아아, 아직 처녀인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그러나 지금 우리는불로 만나려 한다.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저 불 지난 뒤에흐르는 물로 만나자.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올 때는 인적 그친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감상] 이태준은 수필집 ‘무서록’에서
아파트 경비원 할아버지들이쌓인 눈을 쓴다장씨 할아버지눈을 쓸다 말고빗자루 옆구리에 낀 채휴대폰을박씨 할아버지에게 건넨다“박씨, 멋있게 좀 찍어봐!올해 첫눈이잖아!”장씨 할아버지개구쟁이처럼 빗자루 짚고 서서활짝 웃는다[감상] 다음 괄호에 들어갈 말은 무엇일까? 첫사랑은 두 번 다시 겪을 수 없다. 첫째도 복수형이 될 수 없다. 첫인상도 첫 만남도, 첫 삽도 첫 단추도 첫머리도 두 번은 없다. 하지만( )은 무한히 반복된다. 해마다 기다리고 해마다 맞이한다. 잘 모르겠으면, 김소연 시인의 『한 글자 사전』을 펼쳐보든가 장씨 할아버지처럼
껴안는다는 것은껴안긴다는 것선후가 없고피아가 없고주종이 없고인과가 없고좌우가 없고시말이 없어단순하다선후를 가리고피아를 나누고주종을 정하고인과를 논하고좌우를 가르고시말을 따지면복잡해서껴안을 수 없고껴안길 수 없다언제쯤 단순해질까[감상] 포옹(抱擁)이라는 한자를 오래 들여다본다. 포(抱)는 손으로 감싸 안다, 가슴에 품다, 는 뜻이고 옹(擁)은 뜻이 맞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며 껴안는다는 뜻이다. 최근에 누군가를 껴안거나 누구에게 안긴 적이 있는가. 지난 종업식날, 반 아이들을 돌아가면서 꼭 껴안아 주었다. 아이들도 매미처럼 찰싹 달라붙
내 가슴에서 지옥을 꺼내고 보니네모난 작은 새장이어서나는 앞발로 툭툭 쳐보며 굴려보며베란다 철창에 쪼그려앉아 햇빛을 쪼이는데지옥은 참 작기도 하구나꺼내놓고 보니, 내가 삼킨 새들이 지은전생이구나나는 배가 쑥 꺼진 채로무릎을 세우고 앉아서점점 투명하여 밝게 비추는 이 봄저세상이 가깝게 보이는구나평생을 소리없이 지옥의 내장 하나를 만들고그것을 꺼내어보는 일앞발로 굴려보며 공놀이처럼무료하게 맑은 나이를 보내어보는 것피 묻은 그것내가 살던 집에서 나와보는 것너무 밝구나 너무 밝구나 내가 지워지는구나[감상] 내 가슴에서 ‘지옥’을 꺼내고 보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그대 있음에내 마음에 자라거늘오, 그리움이여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나를 불러 손잡게 해그대의 사랑 문을 열 때내가 있어 그 빛에 살게 해사는 것의 외롭고 고단함그대 있음에삶의 뜻을 배우니오, 그리움이여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나를 불러 그 빛에 살게 해[감상] 김남조 시인의 유년은 어두웠다. 아버지와 세 동생을 잃고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폐결핵을 앓았지만, 가톨릭 신앙이 그를 시의 길로 이끌었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한겨울 출장지에서 과음으로 몽롱해진 아침엄마를 닮은 여인이끓여주는 콩나물국밥을 시켜 먹는다엄마는 겨울이면 방안에서콩나물시루에 콩나물을 키우셨다잠결에 물 흐르는 소리가자장가처럼 자주 들리곤 했다동그란 콩이 노란 껍질 모자를 쓰고베보자기를 들어 올리는 힘을 느끼면서콩나물시루에 날마다 물을 붓고 또 붓던 엄마는사랑과 정성으로 콩나물을 키우듯이 나를 키웠을 것이다자주 물을 주어야 잔뿌리가 생기지 않는다고콩나물시루에 틈만 나면 물을 주던엄마와 이별한 지도 아득해진 세월한 사발 가득하던 콩나물국밥이 비워지는 동안얼었던 가슴이 뜨끈해지고가슴속
쌀 씻는 소리오이를 깎는 소리수박을 베어 무는 소리미닫이문이 드륵드륵 닫히는 소리딱 하나만 가져갈 수 있다면무엇을 가지고 갈까앞으로 내가 듣지 못할 것남도 듣지 말았으면 하는 것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면……조용히 우는 소리틀어놓은 텔레비전 위로막막한 허공의 소리손톱으로 마른 살갗을 긁는 소리죽은 매미를 발로 밟는 소리이것 중에 무엇이 좋을까잠시 고민했다이런 거 맞나요?나는 물었고대답은 없었다누가 벌써 대답을 가져간 것일까다 두고 갈 수는 없나요?아주 조용했다누가 벌써 가져간 게 확실했다가질 수 있는 것을가지지 않을 때의 기쁨잠든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