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 내내 푸르른 소나무숲 사잇길 걸으면 맑은기운 가득

포항 청하면 관덕 관송전.박창원 전 청하중학교 교장 제공

맑고 푸른 뜻의 포항시 북구 청하면은 천령산을 비롯한 산세도 수려하거니와 나무와 숲 또한 무성했다. 지금의 송라면도 1914년 이전에는 청하에 속했으니 청하는 말 그대로 푸른 산, 맑은 물의 고장이었다. 청하는 예전부터 노거수가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지금의 청하면사무소 마당에는 수령 300년을 넘는 회화나무가 있는데, 이 고을에 현감으로 부임한 겸재 정선(謙齋 鄭敾·1676~1759)이 남긴 ‘청하성읍도’ 그림에도 등장한다.

청하면사무소와 청하초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는 일대는 원래 ‘청하읍성’이 자리한 곳이다.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기록에 의하면 청하읍성의 규모는 둘레 1353척, 높이 9척에 우물 2곳이 있었다고 하며, ‘청하성읍도’를 통해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장기읍성이 복원된 것처럼 여기 청하읍성도 복원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겸재가 남긴 이 그림이 사실 청하읍성의 설계도와 마찬가지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청하가 다른 지역에 비해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숲 자원이 풍부한 만큼 이 지역을 특화할 수 있는 문화자산이 절실하지 않을까. 특히 겸재가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한다면 청하읍성을 옛 그림으로만 접하는 것이 아쉽다.

조선 최고의 화가이자 화성으로까지 칭송받는 겸재는 우리의 자연을 우리 식으로 그려내는 진경산수화의 창시자이자 동시에 완성자이다. 그는 영조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는데, 영조는 왕으로 등극하기 전에 겸재에게 학문과 그림을 배웠고 왕위에 등극하고 나서도 이름을 부르지 않고 호로 대했다고 할 정도로 그에게는 예우를 다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경상도에서 제일 경치가 좋다는 청하현감으로 올 수 있었던 것도 영조의 배려였다고 한다. 그런 겸재가 청하의 절경에 매혹됐다는 증거는 또 있다.

포항 청하면 관덕 관송전.박창원 전 청하중학교 교장 제공

1733년 이른 봄, 당시 겸재의 나이는 58세로 여기 청하 현감으로 부임해 1734년까지 머물렀다. 비록 2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겸재의 주옥같은 작품은 여기 청하에 머물면서 탄생했고 내연산 계곡에 반한 그는 이곳 경치를 그린 그림을 여러 점 남기게 된다. 이 중 화면 가득하게 산과 폭포가 시원하게 그려진 ‘내연삼용추도’에는 연산폭, 관음폭, 잠룡폭을 차례로 그려 넣었는데, 실제 연산폭포 아래 바위벽에 ‘갑인추 정선(甲寅秋 鄭敾)’이라는 탐승각자가 선명히 새겨져 있는 것을 보니 화창한 가을날 이곳 정취에 반한 겸재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겠다. 갑인년은 1734년이니 현감으로 부임한 이듬해가 되겠다. 또한 우리나라의 영산으로 알려진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을 원 하나에 다 그려 넣은 국보 제217호인 ‘금강전도(金剛全圖)’를 1734년 청하에서 완성하게 된다. 이후 겸재는 노모의 부음을 접하고 현감의 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3년 상을 치르러 이곳을 떠나게 된다. 만약 그가 이곳 청하에 더 오래 머물렀다면 아름다운 이곳의 풍경을 더 많이 남겼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남긴 그림만으로도 이곳 청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청하읍성을 석축으로 쌓은 이는 겸재 정선보다 훨씬 앞선 시기인 조선 세종 때 이곳 청하에 현감으로 부임한 민인(閔寅)이라는 분이다. 안동·봉화·영주·풍기지방의 장정을 동원해 성을 쌓았다고 전한다. 뿐만 아니라 민인은 청하천의 범람을 막고 관에서 쓰일 나무를 조달하기 위해 숲을 조성했다. 청하면 덕성리에 위치한 청하중학교 교정에 현재도 남아 있는 ‘관덕 관송전’이라는 숲이다. 은행나무가 양쪽으로 늘어선 가로수 길을 지나 청하중학교에 다다르면 학교를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숲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원래 이 숲의 동북쪽에 활쏘기 훈련장이 있었다고 하는데 인근에 자연스럽게 주막촌이 조성돼 마을 이름을 활터라는 의미에서 사장(射場)터라고 불리었다. 근데 어감이 좋지 않아 관덕(觀德)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불렀다고 한다. 그러니까 관덕은 지명이다. 사실 활쏘기를 살기(殺氣) 띄운 무술로서가 아닌 덕을 품고 과녁을 봐야 한다는 의미를 살린 것이며, 관송전(官松田)은 이름 그대로 관 소유의 솔밭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연산군과 고종 때 탐관오리가 이 숲을 벌채하느라 훼손했다고 한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벌채되거나 개간돼 약 10㏊에 달하였던 숲이 현재는 0.8㏊에 500여 그루만 남아 있는 상황이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지금보다 숲이 훨씬 넓었다고 하며 지금은 학교 주변으로 들어선 건물위치도 전부 숲이었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현재 기청산식물원과 청하중학교 재단인 관송교육재단이 숲을 인수해 이곳을 잘 보전하고 있으며, 2000년도에는 이 숲이 제1회 아름다운숲 전국대회에서 학교숲 부문 대상의 영예를 차지하기도 했다.

포항 청하면 관덕 관송전.박창원 전 청하중학교 교장 제공

현재 청하중학교의 관덕 관송전의 나무 수령은 80~200년 가까이 된다. 이 숲은 청하중학교를 품는 형상으로 이곳 학생들을 감싸주고 이들에게 맑은 기운을 주는 동시에 지역 주민은 물론 기청산식물원을 방문하는 관람객의 정서를 가꾸는 쉼터로 자리하고 있다.

관덕관송전에서 방향을 조금 틀면 청하면 하대리이다. 이곳에도 규모는 작으나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으나 관리는 그리 잘되지 않고 있다. 하대리 위로는 상대리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이 일대는 포도농장이 넓게 있었다. 1974년도에 모회사에서 이 일대를 매입하여 30㏊ 규모의 포도원을 조성해서 포도주의 주원료를 생산했던 곳이다. 하지만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포도원은 없어지고 하훼단지가 조성됐다가 현재는 농경지로 개간돼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도 각각 소나무밭이 있다. 같은 소나무밭이라 해도 소나무의 모양이 제각각이듯이 관덕관송전은 굵고 높이 자란 소나무들이 제멋이라면 상대리의 솔밭은 나지막하게 자란 500여 본의 해송들이 또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그리고 조금 더 올라가면 유계리라는 곳이 나온다.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곳인데 청하로 해서 경북수목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이다. 유계리라는 지명은 1914년 서계, 유치이·황배이와 같은 자연부락을 통폐합해 불렸다. 서계라는 지명은 청하 고을 서쪽 계곡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인데, 그래서 이 곳 유계리에 있는 마을숲을 숲 수(藪)자를 써서 ‘서계수’라고 부른다. 지금은 유계마을숲이라고 부르는 게 더 익숙하다. 유계마을숲은 앞서 언급한 관송전이나 상대마을숲과 달리 느티나무와 팽나무로 이루어진 활엽수림이다. 나무 수령도 몇 백 년은 됨직해서 이 마을숲으로 지나가면 그 오래된 기품이 마을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이곳도 일제 때 총개머리판을 만들기 위해 느티나무들이 벌채되어 지금은 많이 줄어든 상태라고 하는데 그런 점들이 늘 아쉬울 뿐이다.

청하의 숲을 하나 더 소개한다면, 청하면 청계리에 있는 청계마을숲을 들 수 있다.

마을 입구에 300년생 느티나무가 마을을 지키고 있고, 이름 그대로 마을 앞으로 맑은 냇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동네가 청계리이다. 풍수해를 막고 샛바람을 막기 위해 마을 앞 청계천변을 따라 조성한 수구막이 숲이다. 하지만 이곳 역시 6·25 사변 등으로 훼손이 심했으나 해송을 보완 식재하고 회화나무, 쉬나무 등을 새로이 심고 가꾸어 오래된 느티나무, 팽나무, 말채나무와 어울리는 아름다운 숲을 이루고 있다.

이재원 경북 생명의 숲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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