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한 역사 현장 묵묵히 지켜본 숲

포항시 송라면 두곡숲 전경

마을숲은 수백 년 동안 마을과 함께 해온 숲들이 많다. 마을의 좋은 기운을 보호하고 마을에 액운을 막기 위해 조성된 숲이 마을숲이다.

처음 인공적으로 숲을 만들 때의 목적은 그러했다. 하지만 남몰래 사랑을 가져 서성거렸던 곳도 마을숲이고, 세상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울분을 달래며 걷고 싶은 곳도, 누군가에게 말할 수 없는 마음을 털어놓고, 풀어놓는 곳도 마을숲이 됐다.

나뭇가지에 그네를 매달아 놀던 곳도, 한 여름날 잘 익은 수박 먹으며 더위를 식히던 곳도 마을숲이었다.

즉, 생활의 터전이면서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개인이나 마을의 역사와 같이 해온 것이 마을숲이다.

이렇듯 마을의 역사적 사건을 함께 지켜본 마을숲으로 대표적인 곳이 송라면 대전리에 있는 두곡숲이 아닐까 한다.

대전 3.1의거기념관

7번 국도 변에서 ‘대전리 3·1의거 기념관’이라 써놓은 표지판을 따라 서쪽으로 접어들면 대전리로 향한다. 내연산 지맥이 동해바다 쪽으로 뻗어 나와 형성된 천마산과 또 다른 지맥인 지경리 뒷산 사이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이다. 화진해수욕장으로 흘러드는 대전천이 도로 오른쪽으로 흐르고 높지 않은 바위벽들이 제법 눈길을 줄 만하다. 마을 진입 도로 입구에 ‘三一 만세촌’이라 써진 작은 돌이 있지만 여간 눈 밝은 사람이 아니면 찾아보기도 힘들다. 오히려 이곳 천마산 기슭에 골프장이 생겨서 골프장 입구라고 하면 금방 알아듣는다. 이제 숲의 위치보다 골프장의 위치가 더 익숙하게 됐다.

여기 마을은 고려말기에 제주 강씨가 마을을 일구기 시작한 후 순흥 안씨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번성하게 됐다고 한다.

대전리라는 이름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주변 지역인 산령전(山靈田), 심방(尋芳), 듬실[斗谷]을 합치고, 동대산(東大山)의 ‘대’와 산령전의 ‘전’을 따서 대전리(大田里)라 했다. 글자의 한자씩 따서 만들어진 셈이다. 오늘날도 지역의 통폐합 때 이런 식으로 새로운 지명을 만들곤 하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지명은 지역 고유의 정체성과는 전혀 무관하게, 역사와 전통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게 된다.

대전리의 중심이 되는 마을은 ‘듬실’이라고 하는데, 마을 앞 개울가에 볏집으로 엮은 뜸 모양의 바위가 있어 ‘듬바위’라 하는 데서 듬실[斗谷]이라 붙여졌다고도 하고, 들이 ‘두(斗)’자 모양이어서 두곡(斗谷)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또한 듬실[斗谷]은 3·1운동 때 영일 지역 만세운동의 근거지가 된 마을로 이름나있다. 입구에 ‘3.1 만세촌’이라는 표지석의 내력이 더 궁금해졌다.

만세촌 입구

사실 마을 전체가 80여 호에 불과한 한 마을에서 14명의 3·1의사가 난 곳은 전국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향토사학자 이상준의 ‘포항의 3·1운동사’에 따르면, 대구를 제외한 경북에서는 포항 지역이 가장 먼저 3·1운동이 일어난 곳으로, 1919년 3월 11일 당시 포항면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고 3월 22일 청하면에서 청하 장날에 맞춰 청하면과 송라면 대전리 출신 23인이 주동이 되어 만세시위가 있었다.

이 들은 거사 전날 미리 준비한 태극기로 22일 오후 1시, 만세 선창을 했다. 일본 경찰이 몰려와 총검으로 위협하며 군중들을 해산시키려 했으나 장날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호응해 만세의 함성은 청하장터에 울려 퍼졌다. 덕성리 청하장터에서 일어난 이날의 시위로 주동 인물 23명은 일본 경찰에 검거됐다. 하지만 이들이 검거되어 대구로 압송되자, 송라면 대전리 마을주민들은 그로부터 5일 후인 3월 27일 다시 대전리에서 만세운동을 했는데 그 때의 장소가 바로 두곡숲이었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청하의 만세 시위는 2회가 있었으며 500여 명이 참가하고 부상자와 검거된 사람도 90여 명으로 그 규모가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3·1운동 이후 일본 경찰의 감시가 삼엄한 관계로 80여 호의 가구 수가 50여 호로 줄어들었으나 대전리 어린이들은 골목에서 놀 때도 만세놀이를 할 정도였다 해서 마을을 ‘3·1 만세촌’이라 부른다 한다.

3.1의거기념비

한편 마을에는 의사들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3·1동지회가 선열들의 애국정신을 계승하고 있는데, 여기 지역출신 14인의 숭고한 독립정신과 대전리 마을주민들의 만세운동을 기리는 ‘3·1의거 기념비’가 1986년에 대전리 두곡숲 한쪽에 건립돼 그날의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사실 청하·송라지역 3·1운동에는 이익호라는 분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송라면 화산동(현재의 화진리)출신으로 일찍이 상경해 민영환 선생 휘하에서 항일정신을 본받았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민영환 선생은 자결순국하자 이익호는 고향 송라로 내려와서 대전리에 대전교회를 설립하고 청하 읍내에 청하교회를 설립하는 등 기독교 중심의 구국계몽운동에 힘썼다. 청하장터에서의 3·1운동이 그가 설립한 대전교회에서 시작되었는 것을 보면 그의 역할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918년 45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유지는 장남 이준석에게로 이어졌다. 2001년 설립한 ‘대전 3·1의거 기념관’은 대전리 출신 3·1의사 중 한 분이며, 이익호의 장남인 이준석 의사의 생가터이다. 그리고 2005년에는 기념관 옆에 이준석 의사의 생가를 복원해 두었다.

두곡숲이 역사의 현장이었던 사건은 또 있다. 임진왜란 때도 의병의 활동사가 자리하는 곳이다. 당시 왜군이 인근 화진리 화진해수욕장에 주둔해 있었는데 의병과 관군이 이곳 두곡숲에 매복해 있다가 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두곡숲은 화진리 바닷가와 불과 2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마을에서 화진해수욕장으로 대전천이 흐른다.) 그 후 이곳을 ‘골곡포(骨谷浦)’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이는 마을 북쪽 백사장에 불어온 냄새 때문이었다고 한다. 대동여지도에도 이곳 지명을 골곡포라고 표기했다는데, 이곳 주민이자 향토사학자이기도 했던 고(故) 권명술 옹이 증언한 내용에 따르면 1920년대까지도 바람이 심하게 불면 화진 모래사장에 인골과 함께 당시의 혈전을 가늠하게 하는 유물이 발견됐다고 한다.

두곡숲은 마을에 살던 공씨 부부가 조성했다고 전해지며 예전에는 둘레 8㎞의 넓은 숲이었다고 한다. 숲이 마을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마을 동쪽 큰 숲이라는 뜻으로 대동수(大東藪)라고 불리기도 했다. 지금은 숲 대부분이 농지로 전환돼 그 때의 위용을 볼 수는 없지만 느티나무와 참나무 그리고 소나무 등의 수종이 남아 있으며 수령 200~500년생 노거수가 여러 그루 있어 비록 규모는 작으나 그 기품은 여느 숲 못지않다. 특히 숲 중앙에 보호수로 지정된 거대한 느티나무는 여러 갈래로 자란 수형이 보는 이 누구나 감탄을 하게 한다. 숲의 터줏대감 격으로 마을의 3·1운동은 물론 임진왜란 때의 전투도 지켜보았을 법한 느티나무 노거수는 수령 500년이 넘은 오늘날에도 봄에는 여린 잎을,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가을에는 더 없이 깊은 색으로 물들이다가 겨울에는 마른 가지로만 차가운 바람을 맞는다. 너른 바윗돌과 특히 조그마한 당집과 어울리며 시원하게 서 있는 모습은, 늘 그리는 전형적인 고향의 모습 그대로이다. 주변의 나뭇등걸에 앉아 옹색해진 자신을 잠시나마 내려두고 싶은 그런 마음이 절로 든다. 숲은 여러 그루의 나무가 어우러져서 만들어진다지만, 한 그루의 나무만으로도 때론 숲 못지않은 아우라를 보일 때가 있다.

이재원 경북 생명의 숲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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