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 격동기 문화운동 주도 '민중미술의 대부'

김윤수

1980년대 한국 민중미술에 큰 영향을 끼친 독일의 케테콜비츠는 ‘예술 활동이 현실의 삶과 동떨어진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시대정신을 강인하게 실천했던 화가이다.

한국미술계에도 사회적 참여를 시작으로 현실의 삶과 고민을 바탕으로 당대의 시대정신의 큰 흐름인 민중미술을 탄생시키고 펼쳐온 사람이 있다.

바로 미술평론가 김윤수 선생(이하 김윤수)이다. 김윤수는 1968년부터 한국의 정치사의 격동기에 양심적 지식인으로서 문화 운동을 주도해 예술의 사회적 방향을 찾는 데 힘써왔던 인물이다. 김윤수는 1936년 포항 청하에서 태어났으며 서울대학교 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미학과에서 강사를 시작으로 이화여대, 영남대에서 미술대학 교수를 지냈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장, 전국민족미술인연합회장,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역임했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는 창작과비평사의 대표이사를 지냈다.

필자가 김윤수를 처음 만난 건 2000년 영남대학교 대학원 첫 학기 이론 수업을 받으면서 대면하게 됐다. 희끗희끗한 머리와 왜소한 체격에 두툼한 서적을 가지고 웃음 한 점 없는 깐깐한 표정으로 많은 학생들이 모여 있는 강의실로 들어오는 모습은 마치, 한 치도 헛된 태도와 말을 인정하지 않는 사대부 어른 모습이었다. 깊은 내용으로 열띤 강의를 하셨지만, 진작 학생들은 건성으로 듣거나 따분한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한 학생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와 충고를 주면서 강의를 해주셨지만, 풍요롭게 성장한 젊은 학생들에게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 강의로 비추어졌던 기억이 떠오른다.
 

젊은시절 김윤수

1936년 김윤수는 어렵고 힘든 시기에 태어났다. 부친은 사범학교를 마치고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아 군 소재지 학교에서 근무했는데, 일본인 교장과의 잦은 마찰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인 포항에서 야학을 운영했다. 그러다 경북 청도군 운문면에 위치한 사립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김윤수는 유아기 시절과 포항 흥해국민학교에 잠시 다니다가 청도로 전학을 하면서 청소년기를 보내게 됐다. 김윤수의 인격 형성에는 부친의 품성이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일제강점기에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 없는 이들을 위해 야학을 운영했다는 점과 일본인 교장과의 잦은 마찰은 민족적인 의식과 신념이 확고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김윤수는 고등학교 시절 세계미술사를 접하면서 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진학했다. 이후 모교인 서울대에 출강하던 1968년부터 한국 정치사의 격동기에 학생들은 민주화를 위해 나가서 싸우고 끌려가는데 선생이 지식인이랍시고 책만 보고 앉아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현실참여를 시작했다.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면서 정보부에 수없이 끌려가 곤욕을 치르고, 요시찰 인물 명단에 오르게 되는 등 고문과 탄압, 감옥생활을 했고, 강제해직과 복직되는 일을 되풀이하면서 한국 민중미술의 이론적 틀을 만들어 나갔다. 또한 계간지 ‘창작과 비평’을 만들며 문예 운동과 사회비평에 힘썼고, 서양에서 들어온 추상미술 일색이었던 한국미술계에 민중미술 운동을 주도했다.
 

1966년 창작과비평

김윤수의 예술철학의 신념은 우리 지역에도 도움을 주었다. 한국미술협회 포항지부(당시 지부장 류영재)는 2005년 6월 25일 포항산업과학연구원 강당에서 ‘눈과 마음으로 감동하는 포항시립미술관 건립을 위한 세미나’를 개최했다. 세미나의 주요 안건은 당시 추진 중인 포항시립미술관 건립에 대한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공청회나 토론회 등을 통해 실수요자인 시민들과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한 후 지역 특색에 맞는 제대로 된 미술관을 지어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세미나였다.

이날 김윤수는 포항시립미술관 건립에 관한 특별강의가 진행했다. 김윤수는 “미술관은 접근성이 가장 중요하며, 시민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당시 우리 지역에서는 미술관 건립에 대한 기대치가 컸었기에 시민뿐 아니라 미술인·언론인·관계공무원 등이 참석해 포항시립미술관 건립에 많은 관심을 보여 주었던 세미나였다. 그리고 2007년 봄, 필자가 포항시립미술관 개관 준비 학예사 업무로 바쁜 시기에 큰 시련을 앞두고 있었는데, 김윤수가 큰 조언을 해 줘 어려운 상황을 모면한 적이 있었다. 미술관 건축설계 행정업무, 미술관 공사 현장점검 등 생소하고 어려운 업무로 바쁘고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던 시기였다.

어느 날, 윗선 라인을 통해 한 외부지역 미술 전문가가 프랑스의 예술가 장콕도(Jean Cocteau) 작품을 포항시립미술관에서 구입하는 것이 세계적인 미술관으로 알릴 수 있다며, 강력하게 독촉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나날이 있었다. 그러나 구입 불가하다는 담당자의 간곡한 보고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은 한국미술관의 대표격인 국립현대미술관장의 객관적 판단의 자료를 가지고 구입에 대한 보고서를 다시 한번 제출해 보자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장이던 김윤수의 답변 또한 필자와 같은 생각으로 작품 구입에 반대했다.

“프랑스의 유명한 예술가이지만 미술가도 아닌 사람의 작품을 구입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과 함께 소장품 구입은 철저한 논의와 조사 후에 구입해야 한다.”라는 김윤수의 확답을 얻어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보고 했다. 이후 장콕도 작품은 구입 하지 않는 쪽으로 슬며시 결과가 굳혀져 난관을 극복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포항화단은 1987년 포항미술협회 창립 이후 각종 미술대전과 공기관의 문화센터에서 배출되는 작가들로 인해 지역 미술인들의 수는 엄청나게 늘어났고 많은 성장을 해왔다. 이러한 일면은 자칫 작가정신이 부재한 외형적인 성장만 늘어나는 것 같아 많은 아쉬움을 가지게 한다. 이제는 우리지역 문화예술은 양적인 성장에서 깊이 있는 성장을 추구할 때이다. 이것은 곧 공부하고 연구하는 많은 예술가들의 배출이 필요하다는 말이기도 하고 문화예술에서 정신문화가 중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김윤수가 포항에 남긴 흔적은 유소년 시기에 잠시 보낸 외에는 그의 활동 이력과 뚜렷한 업적은 없다. 또한 미술이론 문화가 전무한 지역 미술환경으로 인해 그의 존재감은 거의 모르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지역이 더 나은 문화발전을 위해 한국 미술계에 존경받고 있는 지역 출신 평론가 김윤수를 상기하며, 진정한 예술정신이 무엇인지 그의 신념을 통해 한 번쯤은 되돌아보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박경숙 큐레이터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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