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에 알천이 범람한 그날 신라의 역사가 바뀌다

신라하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북천. 김주원은 북천이 범람하는 바람에 왕궁에 들어가지 못하고 왕위를 김경신에게 넘겨줬다.

북천(北川)은 경주시가지를 남북으로 가르는 하천이다. 천의 남쪽은 신라왕경을 포함한 구시가지, 북쪽이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공장이 들어선 신시가지이다. 북천은 황룡의 동북쪽 산에서 발원해 덕동호와 보문호를 지난 뒤 시가지로 들어온다. 남쪽으로 황오동과 성건동, 북쪽으로 동천동과 황성동을 관통하며 서천을 만나 형산강이 된다. 북천과 서천은 금장대 아래 절벽에서 합류해 큰 소를 이루는데 이곳이 예기소다.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의 무대다. 『삼국유사』는 ‘북천’으로 『삼국사기』는 ‘알천’으로 기록한다. 국문학자 고 양주동 박사는 ‘알천’이 ‘아리랑’의 어원이라고 주장했다. 한강을 ‘아리수’라고 부르는데 이것도 알천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신라왕궁 월성의 서쪽 출입문 귀정문으로 통하는 월정교.

하천의 범람은 곧 재앙이다. 북천은 큰비가 올 때마다 물이 넘쳐 큰 피해를 입히곤 했다. 160년 아사달 이사금 재위 7년에 물이 넘쳐 집이 떠내려가고 금성의 북문이 무너졌다. 497년 소지마립간 재위 18년에도 5월에 큰비가 내려 물이 넘쳤다. 집 200여 채가 떠내려가고 물에 잠겼다. 진평왕 때는 민가 3만360호가 수몰되고 200여 명이 죽는 참사가 발생했다.

785년 정월 선덕왕이 재임 5년 만에 죽었다. 겨울에 장대비가 쏟아져 알천이 넘쳤다. 이번에는 비가 역사의 물줄기를 바꿨다. 왕위 계승 1순위에 있던 김주원의 집은 알천의 북쪽 20리에 떨어져 있었다. 왕의 서거 소식을 전해 들은 김주원은 폭우를 뚫고 급히 왕궁으로 향했다. 그러나 비로 불어난 알천이 발목을 잡았다. 김주원이 불어난 강물 앞에서 발을 구르는 사이에 왕위 계승 2순위인 김경신이 잽싸게 왕위에 올랐다. 그가 신라 제38대 원성왕이다.

원성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괘릉.

그때 상황을 『삼국유사』는 이렇게 전한다. “선덕왕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 사람들이 김주원을 받들어 왕으로 삼아 장차 궁으로 맞아들이려고 하였다. 그의 집이 북천의 북쪽에 있었는데 갑자기 냇물이 불어 건널 수가 없었다. 왕(김경신)이 먼저 궁에 들어가 왕위에 오르자 상재(김주원)의 무리들이 모두 와서 따르고 새로 오른 임금에게 축하를 드리니 이가 원성대왕이다. 이름은 경신이요, 성은 김씨이니….”

기사는 김경신의 무혈쿠테타를 이렇게 간략하게 적고 있다. 비가 와서 북천이 불어나 김주원이 하천을 건너지 못했다. 왕을 정하는 자리에 1순위 왕위계승자가 나타나지 않자 김경신을 지지하는 이들이 이것이 하늘의 뜻이라며 김경신을 왕으로 추대했다. 이 정도 분위기라면 김경신 측이 물리적으로나 명분상으로나 회의장을 압도했을 것이다. 김주원 측 사람들, ‘상제의 무리’들이 위협을 느꼈다. 그들은 김경신의 즉위를 인정하고 축하하기에 이르렀다. 왕위에 오른 김경신은 김주원에게 정치적 보복은 하지 않았다. 강릉에 영지를 주어 먹고살게 했다. 김주원은 강릉김씨의 시조가 됐다. 김주원의 아들 종기와 헌창에게도 벼슬자리를 내주며 왕경에 살게 했다. 김헌창은 뒷날 헌덕왕 때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었다.

세 마리의 용이 물고기로 변했다는 호국삼룡변어정.

김경신은 ‘준비된 왕’이었다. 5년 전인 780년 4월 김양상(뒷날 선덕왕)과 김경신(뒷날 원성왕)은 병사를 지휘해 왕궁으로 돌격했다. 반란군 김지정이 혜공왕과 왕비를 인질로 잡고 두 달 동안 왕궁을 점령하고 있었다. 치열한 전투 끝에 김지정을 죽이고 왕궁을 탈환했다. 혜공왕과 왕비를 이미 죽어 있었다. 반란군을 진압한 김양상이 왕위에 올랐다. 그가 37대 선덕왕이다. 왕은 반란군을 진압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김경신을 상대등으로 임명했다. 김경신은 내물왕의 12대손으로 신라의 명문가 자손이었다.

김경신은 왕위에 오르기 위해 상당한 준비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먼저 꿈을 활용한다. 『삼국유사』‘원성대왕’조의 첫 문장은 김경신의 꿈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찬 김주원이 상재(上宰)가 되고 왕(김경신)은 각간으로서 이재(二宰)의 자리에 있었는데 꿈에 머리에 쓴 두건을 벗고 흰 갓을 썼으며 12현금을 들고 천관사(天官寺)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꿈에서 깨어 사람을 시켜 점을 쳤더니 ‘두건을 벗은 것은 관직을 잃을 징조이고 가야금을 든 것은 칼을 쓸 징조이며 우물 속으로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징조입니다’라고 말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매우 근심하여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때 아찬 벼슬을 하는 여삼(餘三)이라는 사람이 정반대의 해몽을 내놓았다. 두건을 벗은 것은 위에 앉은 이가 없음이고 흰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이며 12현금을 든 것은 12대 자손에게 왕위를 전할 징조요,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궐에 들어갈 상서로운 조짐이라는 것이다. 용기를 얻은 김경신은 여삼의 건의를 받아들여 북천의 신에게 비밀리에 제사를 지냈다.

그는 이때부터 왕이 되기 위한 실행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북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제사만 지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왕궁에 우호세력을 심고 김지정의 반란을 진압할 때 함께 움직였던 동지들을 규합했을 것이다. 반면 왕위계승 1순위인 김주원은 전혀 준비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무열왕 김춘추의 6대손으로 혜공왕과 같은 무열왕계다. 집사부 중시를 지냈다. 요즘으로 말하면 행정안전부와 국가정보원을 합친 조직의 장관이었다. 김지정의 반란 때 그 조짐도 알아채지 못해 왕궁이 점령당하고 왕과 왕비가 죽었다. 진압작전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왕이 죽는 날 그 곁에 없었다. 왕이 죽음에 이르도록 병세가 심했는데도 왕궁에서 20리나 떨어져 있는 집에 가 있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무열왕계와 내물왕계 후손들의 왕위쟁탈전은 싱겁게 내물왕계의 승리로 돌아갔다.

김경신은 왕위에 오른 지 한 달 만에 ‘무혈쿠테타’의 흔적을 지우고 정통성 세우기에 열을 올린다. 그는 성덕왕과 선덕왕의 아버지인 개성대왕의 사당을 헐고 시조대왕, 태종대왕, 문무대왕, 조부 흥평대왕과 아버지 명덕대왕으로 5묘를 삼았다. 시조대왕과 김춘추 김법민 같은 신라인들의 존경을 받는 ‘역대급 대왕’ 옆에 왕족에 불과한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대왕으로 슬그머니 끼워 자기 가문의 격을 높이고 왕권 계승자로서의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다. 아들 인겸을 왕태자로 지정하는 한편 어머니 박씨를 소문태후로 봉했다. 자기 집안 잔치로만 끝내지 않았다. 왕은 관료들의 마음을 얻어야 했다. 필요했다. 모든 문무백관에게 작(爵) 1급을 올려줬다. 이 모든 일이 즉위 한 달 만에 이뤄졌으니 원성왕은 선덕왕이 죽기 직전에 상당한 준비했던 것이다.

복원중인 천관사지. 원성왕은 천관사 우물에 들어가는 꿈을 꾼 뒤 왕이 됐다.

원성왕은 영원불변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상징조작을 만들기로 했다. 신문왕 이후 민중들에게 가장 많은 신뢰를 얻는 신물은 만파식적이다. 원성왕은 이 만파식적이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신물이며 자신이 왕이 되면서 아버지 효양에게서 받았다고 자랑함으로써 왕권의 정통성이 자신에게 있음을 내비쳤다. 일본 군대가 만파식적이 두려워 공격을 하지 못했다. 일본 사신이 두 차례나 만파식적을 보여 달라고 했으나 보여주지 않았다. 걸핏하면 감포, 장기, 흥해 앞바다에 나타나 약탈을 일삼는 일본군대는 신라의 천년 역사에서 내내 골칫거리였다. 만파식적이 그 걱정을 덜어줬다. 당나라 사신이 분황사 우물의 용을 비롯한 세 마리의 용을 훔쳐갔을 때도 왕이 하양관(경산)까지 쫓아가서 용을 구했다. 왕은 호국용을 구한 영웅신화의 주인공이 됐다. 분황사 모전석탑 옆에 있는 돌우물, 호국삼룡변어정이 그 증거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원성왕은 무혈쿠테타로 왕에 올랐으나 뒤가 좋지 않았다. 후손들 간에 피비린내 나는 왕권쟁탈전을 벌였다. 삼촌이 조카를 죽이고 6촌 형제가 서로 죽이며 왕위를 다퉜다. 손자(39대 소성왕)에게 넘어간 왕위가 아들(40대 애장왕, 46대 문성왕)에게 넘어갔고 다시 숙부(41대 헌덕왕, 47대 헌안왕)에게 돌아갔다. 동생(42대 흥덕왕)에게, 5촌(43대 희강왕)에게, 6촌(44대 민애왕, 45대 신무왕)에게 사위(48대 경문왕)에게 돌고 돌고 돌아갔다. 원성왕이 죽은 뒤 제52대 신덕왕이 박씨로 왕이 되기까지 99년 동안 무려 13명의 왕이 등극했다. 원성왕의 후손들이 왕좌를 놓고 머리 터지는 전쟁을 벌인 결과다. 신라는 원성왕 이후 빠른 속도로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1000년 전 그 겨울에 비가 오지 않았다면? 김주원이 죽어가는 선덕왕 옆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면? 신라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대한민국의 역사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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