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새재아리랑'엔 송옥자, '송옥자'하면 문경새재아리랑으로 불려

송옥자 문경새재아리랑 전승자.
송옥자 문경새재아리랑 전승자.

“‘문경새재아리랑 하면 송옥자, 송옥자하면 문경새재아리랑’이라는 등식이 이뤄집니다.”

송옥자(69) 문경새재아리랑 전승자는 어린 시절부터 민요 부르는 것을 좋아하다가 아버지가 “기생 되려 하느냐?”고 나무라는 바람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22세에 문경시 문경읍 팔영리로 시집온 것이 문경새재아리랑과 첫 인연을 맺었다. 송 전승자는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를 창립해 문경새재아리랑 가사를 채록하고 창작하는 등 아리랑 대중화와 문경새재아리랑 원형 보존과 확산에 반평생의 열정을 불태웠다. 또 현재 문경새재아리랑은 우리나라 아리랑 대중화의 선두에 서 있음을 학계에서도 인정하는 등 문경새재가 ‘아리랑 고개’임을 증명하는데 기초를 다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경새재아리랑 악보.

△ 고단한 시집살이 속에 만난 문경새재아리랑.

송옥자 전송자는 시부모 없는 시집에는 시할머니와 남편, 어린 시누이와 시동생들이 있었고 맏이인 그들 내외는 눈코 뜰 새 없이 10년을 지났다. 시동생·시누이들이 출가하고 그들 부부도 3남매를 두었으며, 그 사이에 다정했던 시할머니도 돌아가셨다. 1986년께 동네 이장을 맡은 남편이 문경읍에서 산불예방 방송용 녹음테이프를 가져 왔는데 그 녹음테이프를 하루에도 몇 번씩 틀어 ‘산불조심’을 홍보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속에 고 송영철 할아버지가 부르는 문경새재아리랑이 있었다.

송 전송자는 경기민요를 시시때때로 흥얼거리며 고단한 일상을 헤쳐 나오다가 송 할아버지의 상여소리 같은 문경새재아리랑을 접하고, 아무 생각 없이 따라 불렀고, 그것이 오늘에 이르게 됐다고 한다.

송옥자 씨는 “시할머니 역시 ‘보리개떡 소리’를 비롯해 본인만 아는 구전민요를 많이 흥얼거렸는데, 지금 와 생각해 보니 아주 소중한 문경의 민요였다”고 회고했다. 그중 ‘보래개떡 소리’는 전수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할까, 지나간 시간과 지나간 어르신들이 너무 아쉽고 그립다고 술회했다.

△ 남편 응원 속에 본격적으로 민요 배우기.

송옥자 전송자는 그렇게 가슴 저 밑에 있던 소리에 대한 열망이 결혼 10년을 지나면서 다시 싹 텄고, 남편의 응원 속에 민요를 배우기 위해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 그 결과 전국민요경창대회에서 여러 번 수상하는 실력을 발휘했고, 시조창에도 입문해 명창부까지 오르는 등 쾌거를 이뤘다.

특히 향토민요인 문경새재아리랑을 전수해 보라는 당시 문경읍장의 권유로 문경새재아리랑 공부에 몰입해 송영철 할아버지의 소리를 바탕으로 송옥자 씨의 소리로 체화(體化)하는 데 성공했다.

1996년 문경문화원 주최 ‘제4회 향토민요경창대회’에 출전해 문경새재아리랑을 불러 우수상을 차지했고 그때 송영철 할아버지를 극적으로 만났다.

송 할아버지는 “어데 송 씬가?”냐고 묻자 “은진”이라고 대답하자, 송 할아버지는 같은 문중이라며 반갑게 맞아 주셨다고 한다. 그러면서 “소리 잘하네, 문경새재아리랑 잘 공부해 보라”고 격려했다는 것이다.

이에 힘입어 1998년 ‘제6회 향토민요경창대회’에서 장원을 차지했고, 문경시 대표로 대회에 나가 우수상을 수상했다.

만난 지 3년도 채 안 돼 송영철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곧바로 2001년 4월에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를 창립해 ‘송영철 할아버지 소리’ 대중화에 나서게 된다.

송 전승자가 문경새재아리랑 대중화에 나서자 문경시와 문경문화원은 “장롱 속에 숨어 있던 보물을 찾았다”고 반겼다고 한다.

문경지역에는 특별한 전통음악이 없던 차에 송옥자 전승자가 만든 30분짜리 ‘문경새재아리랑 악극’은 신선했고 파격적이었다. ‘문경새재아리랑 악극’은 얼마 전까지 우리 일상에서 보던, 그러나 이제는 사라져 볼 수 없는 할머니·어머니의 생활상을 문경새재아리랑 가락 속에 펼쳐 보인 악극은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고 볼 수 없는 한 편의 영화였고, 다큐멘터리였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문경을 홍보하는 데 최고의 상품이 됐다고 한다.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가 문경읍에서 3·1절 100주년 기념 ‘문경새재아리랑’행사를 개최했다.

△ 문경새재아리랑 원형 보존과 확산에 열정.

송옥자 전승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공연일정에 아무것도 돌아볼 수 없는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몸은 고됐고, 벌이는 시원찮았지만, “언제·누가·나를 이만큼 찾아 주랴” 여기고 밤낮없이 문경새재아리랑에 파묻혀 지냈다.

그 결과 문경새재아리랑 가사 147수를 채록하고, 문경만세아리랑 6수 창작, 가네코후미코아리랑 4수 창작, 문경사투리아리랑 5수 창작, 문경의병아리랑 15수 창작, 문경찻사발아리랑 20수 창작, 청운각아리랑 5수 창작, 탄광아리랑 4수 창작 등 문경새재아리랑의 원형 보존과 확산에 열정을 불태웠다.

2001년 보존회 창립 이후 2019년까지 456회 공연을 펼쳐 문경시민들이 문경새재아리랑을 누구나 부를 수 있게 했고, 대외적으로 문경새재아리랑의 위상을 높였다.

이에 따라 현재 문경새재아리랑은 우리나라 아리랑 대중화의 선두에 서 있음을 학계에서 인정하도록 했고, 문경새재가 아리랑고개임을 증명하는데 기초를 다졌다.

그런 노력 결과 크고 작은 방송에 23회 출연했고, 각종 언론에 236회 보도됐으며, 2006년 자랑스런도민상 수상, 2007년 문경대상 문예체육부문상 수상, 2010년 제5회 아리랑상 공로상 수상 등 그 위상을 굳건히 했다. 이와 함께 문경시가 ‘문경새재아리랑제’라는 축제를 2008년부터 현재까지 13회를 개최할 수 있게 했고, 유네스코인류문화유산으로 아리랑이 등재되는데 문경새재아리랑 대표로 서명하는 영광도 얻었다.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현판식 모습.

△ 아리랑에 받친 30년 청춘의 시련.

‘문경새재아리랑하면 송옥자, 송옥자하면 문경새재아리랑’이라는 등식이 이뤄졌다.

송 씨는 수많은 업적을 공고히 하려고 임의단체인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를 2014년 사단법인으로 변경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그동안 보존회 인적구성을 송옥자 본인이 교육한 사람만 대상으로 하다가 다른 임원들이 이 사람 저 사람 가입시키면서 보존회 운영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여태껏 문경새재아리랑을 가르치고, 이를 무대에 올리는 것만 신경 써 왔는데, 기관운영이라는 복병을 만났다는 것이다.

송 전승자가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매일 같이 문경새재아리랑을 위해 잘 모시겠다며 통장이며, 직인이며, 모든 서류를 갖고 관리해 주던 사람이 그 선두에 섰다는 것이다. 그날로부터 지금까지 자신을 보호하고 해명하는데 진을 뺐다. 해보지 않은 일이라 아리랑을 가르치고 공연하는 일보다 수십 배 어려웠다고 한다.

송 씨는 “가장 두려웠던 일은 문경시로부터 받은 공금을 횡령했다고 고소한 일로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것을 그렇다고 수군거리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송옥자 씨는 “물은 제 길로 흐른다고 하지 않은 일이 어찌 한 일이 되겠으며, 한 일이 어찌하지 않은 일로 되겠는가? 길고 긴 수사기관의 조사에서 아무 일도 없는 것으로 결과가 나왔으나, 앞에 남은 것은 허탈과 좌절뿐이었다”며 “이까짓 거 안 한다고 뭐라 할 사람도, 한다고 그리 칭찬할 사람도 없는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특히 문경새재아리랑의 본질을 보고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겉을 보고 접근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조언이 정말로 듣기 싫었다고 한다.

그래서 송 씨는 지금은 빈 들판 위에 서 있는 느낌이지만 “그러니 어쩌겠어요. 이 일을 누가 하라고 한 것도 아니고, 내 신명에 뻗쳐 해 온 일인데, 또 해야지요? 아리랑 안 하면 몸이 아파서 못 견뎌요”라며 다시 한번 굳건한 의지를 보인다.

송옥자 문경새재아리랑 전승자가 아리랑 타령

송옥자 전승자는 “30년 아리랑 세월에 늙어버린 청춘. 70살이 내일 모렌데, 아직 갈 길은 멀고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일모도원(日暮途遠)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냐” 라고 말을 맺었다.

문경새재아리랑에 혼을 바친 송옥자. 아마 송옥자의 일생은 문경새재아리랑이라는 보자기에 싸인 보석일지 모른다. 지금은 아무도 모르는….
 

황진호 기자
황진호 기자 hjh@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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