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물결치게 한 굴곡진 산모롱이 빛과 만나 상상 이상의 장면 연출

자연과 어우러진 기기암.

은해사 주차장에 차를 주차했다. 오늘은 영천시 청통면 은해사에서 경산시 와촌면 약사암 입구까지 총 5.6㎞를 여행한다. 대구 날씨 38도. 차에서 내리는 순간 거대한 열기가 회오리쳤다.

은해사 앞 상가.

편의점에서 얼음물 여러 병을 사서 배낭에 넣었다. 강렬한 햇볕에 놀란 사람들은 시원한 곳으로 숨어버렸고 식당가는 무료한 신음을 토해내며 노릇노릇 익어갔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은해사 광장 음악 분수대.

일주문 앞 광장에서 평일에는 하루 세 번, 주말엔 네 번 한다는 분수 쇼가 한창이다. 경쾌하거나 리드미컬한 음악에 맞춰 물줄기가 춤을 춘다. 하늘로 치솟았다. 낮아졌다 가볍게 흔들리기도 하면서 광장 온도를 낮추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관객은 꼬마 한두 명 뿐이다.

삼거리 & 기기암은 왼쪽.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끊고 포석정 숲길을 걸었다. 기기암은 은해사 템플스테이 수련관 가는 길로 곧장 올라가다 삼거리에서 좌회전이다. 이곳에 일곱 개의 암자가 표시되어 있다. 기기암과 서운암은 왼쪽 길이고 묘봉암, 중암암, 백흥암, 운부암은 직진, 백련암은 우측 길이다. 온 숲이 절이다. 대부분 천년고찰이다. 숲길로 들어서자 체감온도가 조금 떨어졌다.

서운암으로 들어가시는 스님.

앞서 가시던 스님이 서운암으로 들어가신 뒤 길은 다시 고즈넉해졌다. 장마가 길어진 탓에 길 위에 초록 이끼가 꼈다. 축축한 숲을 말리기엔 최적의 기온. 사람 손을 덜 탄 자연에서 본연의 향기가 맡아졌다.

안흥폭포.

0.1킬로 앞에 안흥폭포 표시가 있다. 폭포를 상상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제주의 천지연폭포부터 황진이 서거정도 반한 박연폭포, 캐나다와 미국 국경 사이에 있는 나이아가라와 악마의 목구멍이란 별칭을 가진 이구아수 폭포도 상상되었다. 하지만 안흥폭포는 상상 속 어느 폭포와도 닮지 않았다. 폭이 넓지도 웅장하지도 않다. 이구아수 폭포처럼 세상을 집어삼킬 듯한 포스도 아니다. 그냥 이 골짜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물줄기였다. 여러 개의 바위를 치고 내려와 가장 낮은 곳으로 떨어지는 소박함. 가방을 내려놓고 물에 손을 담갔다. 끈끈함이 한 방에 날아갔다. 자연이 만들어 낸 걸작 중 하나인 폭포는 대부분 깊은 산속에 있다. 땀방울을 흘리며 올라온 자에게만 그 모습을 보인다. 그 오만함이 싫지 않다.

인삼뿌리를 연상케한 뿌리.

짧은 휴식 후 다시 길을 나선다. 바닥에 나뭇가지와 이파리가 기하학적인 무늬를 만들었다. 검은 무늬가 많을수록 그늘도 깊다. 이번 여행에서는 자연이 만들어 낸 걸작을 몇 개 더 보았다. 죽은 나무가 동물의 형상으로 풍화되어 가고 비에 쓸려 드러난 나무뿌리는 산삼 뿌리를 연상케 했다. 무엇보다 가슴을 물결치게 한 건 굴곡진 산모롱이였다. 밭고랑을 세로로 세워둔 것 같은 풍경이 빛과 만났을 때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장면이 연출되었다.

동물형상으로 풍화되어 가는 나무둥치.
빛, 나무, 그늘이 공조한 피사체.

사진을 찍으면 그것을 단지 그것에만 머물게 하지 않는 아주 특별한 피사체가 되었다. 태양, 나무, 빛과 어둠이 조력자 역할을 해준 덕이다. 자연은 비바람에 깎이고 벌레가 파먹고 세월에 닳은 모습 그대로를 보여준다. 그것에서 의미를 유추해 내는 건 여행자의 시선이지 싶다.

복숭아나무와 버섯.

한여름 숲은 생동감이 있다. 와글와글, 시끌시끌하다. 살아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게 한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 소리, 이름 모를 새와 벌레 소리. 그 가운데 으뜸은 매미다. 정말 시끄럽다. 귀가 아프다. 우는 건 모두 수컷이다. 암컷의 마음을 얻기 위해 울고 또 운다. 우렁차게 울어야 암컷의 환심을 사서 짝짓기를 할 수 있으니 8월의 숲은 뜨거울 수밖에 없다.

기기암.
기기암 입구.박성규

드디어 기기암에 도착했다. 산세가 아늑하고 평화롭다. 절 아래 텃밭엔 자급자족용 채소를 재배하고 높은 돌담 너머로 보이는 사찰 지붕은 구중궁궐 같다.

기기암 마애석불.

저 속에서 도량에 힘쓰고 있는 스님께 누가 될까 하여 경내엔 들어가지 않았다. 국왕의 평안을 기원키 위해 신라시대(816년) 정수(正秀)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기이할 기(奇)가 두 번 들어간 기기암(奇奇庵)이 궁금했다. 신기사바 심기극락(身寄娑婆 心寄極樂), 몸은 사바세계에 머물고, 마음은 극락세계에 있다는 뜻인데, 있고 없는 것에 연연하지 않으려 해도 몸을 사바에 두고 마음을 다스리는 일은 참으로 어려울 것 같다.

기기암 미니 정원.

해발 350m 산허리에 앉은 절은 특히 정원이 아름답다. 화단에 법구경 내용이 있어 옮겨본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지 마라. 미운 사람과도 만나지 마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운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

원효암 가는 숲길.

마음을 시끄럽게 하지 말란 뜻인데 뻔히 알면서도 사랑에 목숨을 거는 게 인간임을 생각하며 기기암 오른쪽 계곡을 가로질러 산길로 들어섰다.

깊은 산속 옹달샘.
옹달샘.

옹달샘이 나왔다. 빨간색의 귀여운 표주박이 나무뿌리에 걸렸다. 한 바가지 떠서 입안을 헹구고 손을 씻었다. 물 한 바가지에 금방 행복해졌다. 다시 오르락내리락 산허리를 돌고 돈다. 숲이라 폭염의 날씨에도 숨은 쉬어진다.

원효암 마애불상 입구 이정목.

이정목을 보니 원효암이 가깝다. 언덕길을 내려섰다. 오른쪽 암벽에 마애여래좌상이 보인다. 한여름에도 얼음처럼 차다는 약수터 옆으로 나무 계단이 이어졌다.

원효암 마애불상 가는 계단.
원효암 마애불상에서 내려다 본 풍경.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86호인 마애석불은 커다란 바위 중간에 홈을 파서 그 속에 돋을새김 했다. 연꽃 모양의 받침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인데 얼굴은 마모가 심해 알아보기 힘들다. 통일신라 조각기법에 좌불 뒤쪽으로 불상의 배후에 광명을 나타낸 의장이 새겨졌다.

원효암 입구 & 참 좋은 인연.
원효암 매애불상 경상북도 문화재.

길 따라 내려오니 원효암 뒷모습이 보인다. 굵직굵직한 소나무가 호위무사 같다. 절이 앉은 자리는 몽땅 명당 같다. 원효암은 원효대사가 668년에 창건하였고 긍월 대사(亘月大師)가 1882년(고종 19)에 중건하였지만 1986년에 팔공산 일대에 큰 산불이 나서 전각 등이 소실되었다. 1990년에 중창한 관계로 예스러운 멋은 덜하다.

원효암 뒤태.
원효암 약수터.

절 입구 커다란 소나무에 ‘참 좋은 인연’이란 글귀를 걸어두었다. 오늘 이곳을 지나는 것 또한 우주의 기(氣)에 의한 흐름이 아닐까 싶다. 하늘도 동물도 나무와 풀도 다 인연이다. 우툴두툴, 꼬불꼬불한 임도를 윙윙대며 달려드는 모기와 하루살이를 쫓으며 걸었다. 나무에 기생하는 독버섯이 참 예쁘다. 독을 품은 것은 그 사실을 숨기려 외형을 더 아름답게 꾸미는데 코로나는 형체도 냄새도 없이 전 인류를 공격한다.

약사암 입구.
약사암 입구 까마귀 한 마리.

바이러스로부터 자유로울 날을 소원하며 오늘 종착지인 약사암 입구에 도착했다. 후텁지근한 공기가 재빠르게 착륙을 시도한다.

글 임수진·사진 박성규

◇ 주변에 가볼 만한 곳

△ 중암암 9경북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576)=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산내 암자중 하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심지왕사가 창건하였다. 동화사를 창건한 인물로도 알려짐. 중암암(中岩庵)은 이름처럼 두 개의 바위가 양편에 문처럼 버티고 있다 하여 일명 ‘돌구멍 절’이라고 한다. 은해사 산내 암자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법당 뒤 봉우리에 세 개의 바위(삼인암)이 있는데 아들 삼형제가 정진하여 뜻을 이루었다는 스토리가 있으며 김유신 장군이 심신을 단련한 곳으로도 전해진다.

저 정자에 앉으면 세상 시름 사라질 듯.
기기암 가는 숲길.
기기암 가는 길.
기기암 앞 풍경과 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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