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을 몰라본 오만했던 어린 왕 석가·불무사 지어 자비를 구하다

망덕사 동탑지와 금당지.

그의 이름은 김이홍(金理洪)이다. 이공(理恭)이라고도 한다. 태어나보니 통일신라의 왕자였고 왕위계승자였다. 아버지는 김정명, 신문왕이고 할아버지는 김법민, 문무왕이다. 아버지 신문왕이 재위 12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나라를 떠맡았다. 692년 그의 나이 겨우 6살이었다. 그가 신라 제32대 효소왕(孝昭王)이다.

치세는 태평세월이었다. 효소왕 즉위 16년 전에 삼국이 통일된 뒤 전쟁은 끝났고 변방은 대체로 안정됐다. 나당전쟁 이후 당나라와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했지만, 일본과의 외교를 두텁게 해 뒷문을 안정시켰다. 당나라와 일본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며 모처럼 평화로운 시기를 맞았다. 안으로는 신문왕 즉위 초에 김흠돌 난과 대문의 난이 일어났으나 바로 진압됐고 효소왕 9년에 경영이 반역을 꾀했다가 처형됐다.

나당 전쟁 이후 당나라와 관계가 매끄럽지 못했다. 신문왕 재위 시 당나라 중종이 김춘추의 묘호인 태종(太宗)이 당태종의 묘호와 같다며 고칠 것을 요구했다. 신문왕은 이를 거절했다. 당나라에 대해서는 저자세를 유지하면서도 할 말과 실속은 챙기는 실리외교를 펼쳤다. 신라의 실리외교, 당나라에 대한 보여주기식 충성쇼를 상징하는 기념비가 망덕사(望德寺)다. 이 절은 나당전쟁 당시 당나라의 사찰단을 속이기 위해 세운 절이다. 문무왕은 전쟁승리를 위해 낭산 자락에 사천왕사를 건립하고 명랑법사를 시켜 문두루비법을 시행하게 했다. 그 결과 당나라 대군이 바다를 건너오다 몰살했다. 이런저런 정보를 입수한 당나라에서 예부시랑 악붕귀를 서라벌에 보냈다. 그는 사천왕사를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신라는 그에게 급조한 가짜 사천왕사를 보여줬다. 그 절이 망덕사다. 악붕귀가 절을 본 뒤 ‘망덕요산지사(望德遙山之寺)’라고 했던 말에서 비롯됐다. 어쨌거나 악붕귀는 뇌물을 먹고 당나라에 돌아가 그대로 보고했다. 그 뒤부터 망덕사는 중국황제의 만수무강과 황실의 번영을 축수하는 절로 남았다.

경주시 조양동에 있는 효소왕릉.

효소왕 6년, 망덕사 낙성식이 열렸다. 이 행사를 당나라가 지켜봤을 것이다. 행사가 행사인 만큼 효소왕이 직접 참여해 부처님께 공양을 했다. 그때 초라한 행색의 비구가 왕 앞에 나타나 자신도 재에 참여하도록 해달라고 간청했다. 말석에 앉아 밥이라도 먹을 수 있도록 조치했다. 12살의 소년왕 김이홍은 기가 막혔다. 삼국통일을 이루고 ‘사사성장 탑탑안행’하는 태평시대가 열렸다. 서라벌 도성 어디에 저런 거지 스님이 있다는 말인가. 저런 행색으로 왕 앞에 나타난 저 중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어린 나이에 왕좌에 앉았으니 기고만장하기도 했을 것이다.

“스님은 어디에 사는가?” 왕이 물었다.

“비파암입니다” 스님이 말했다.

왕이 살짝 비꼬듯 말했다. “스님은 어디 가서 왕이 직접 공양하는 재에 참석했다고 말하지 말라.”

스님도 물러서지 않았다. “ 폐하 역시 다른 사람에게 진신석가를 공양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스님은 몸을 솟구쳐 하늘로 올라가더니 남쪽으로 갔다. 12살 소년 효소왕은 깜짝 놀랐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내가 사고를 쳤다. 허겁지겁 동쪽에 있는 산으로 달려가서 부처님이 사라진 쪽을 향해 절을 수도 없이 했다. 그러고도 불안은 가시지 않는다. 사람을 시켜 족적을 찾아보니 남산 삼성곡 혹은 대적천원이란 곳에 이르러 지팡이와 바리때를 돌 위에 놓고 숨었다고 한다. 왕은 부처님이 산다고 했던 비파암 아래 석가사를 세웠다. 그러고도 부족하다. 부처가 사라진 곳에 불무사(佛無寺)를 세워 지팡이와 바리때를 나누어 안치했다.

장사 벌지지는 박제상 부인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하는 곳이다. 비석 너머 보이는 숲이 망덕사지다.

석가사와 불무사는 효소왕이 부처님께 제출하는 반성문이다. 효소왕이 이렇듯 자신의 잘못을 드러내놓고 ‘셀프디스’하는 속뜻은 무엇일까? 결국은 신화를 통한 권위 세우기일 것이다. 할아버지 문무왕은 동해의 용이 됐고 신문왕은 문무왕과 김유신으로부터 만파식적을 얻었다. 나이 어린 왕은 명예를 드높일 어떤 일도 이루지 못했다. 망덕사 낙성식을 계기로 진신석가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점을 포장해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나도 위대한 왕이다.

잠늠골삼층석탑. 석가사와 불무사를 수호하기 위해 지은 절이라는 설이 있다.

망덕사지는 이 사건 이후 국가 위기를 알리는 예언적 기능을 했다. 경덕왕 때 당나라에서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탑이 흔들렸고 원성왕 14년에는 봄에 궁궐 남쪽 누교에 화재가 나고 망덕사의 두 탑이 서로 부딪쳤다. 애장왕 5년에 우두주 난산현에서 누워 있던 돌이 일어섰다. 웅천주 소대현 부포의 물이 핏빛으로 변하자. 9월에 망덕사의 두 탑이 또 부딪쳤다. 헌덕왕 8년 흉년으로 백성들이 굶주렸다. 한산주 당은현에서 길이 10척 폭 8척 높이 3척 5촌이나 되는 돌이 저절로 100여 보를 옮아가는 이변이 일어났을 때 6월에 망덕사의 두 탑이 부딪쳤다.

보물69호 망덕사지 당간지주.

망덕사는 사천왕사가 있는 낭산과 남산 사이의 들판에 있다. 사천왕사와는 경주시내에서 불국사를 잇는 산업로를 사이에 두고 대각선으로 마주 보고 있다. 사천왕사에서 통일전 방향으로 가다가 남천 건너기 전에 왼쪽 농로를 따라가면 있다. ‘장사 벌지지’라는 비석이 나오는데 박제상 부인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이다. 비석의 북쪽에 있는 소나무숲이 망덕사지다. 통일신라 시대의 전형적인 사찰 건축방식인 쌍탑가람양식이다. 금당지를 중심으로 좌우로 동서 목탑지가 있고 그 남쪽에 중문지가 있다. 금당지의 북쪽에 강당지가 있으며 이들을 둘러싸는 회랑지가 있다. 금당의 좌우에는 익랑지가 있으며 중문지의 남쪽에는 계단터가 있고 그 서쪽에 보물 69호인 당간지주가 있다. 넓은 들판 곳곳에 초석과 석재가 흩어져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귀면와와 명문전, 개원통보 외에도 고려 시대의 청동정병이 수습돼 고려 시대까지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멀리 보이는 사천왕사지는 현재 발굴조사 중이다.

진신석가가 효소왕에게 일침을 놓은 뒤 몸을 솟구쳐 날아간 곳은 산 넘어 서남산 비파골이다. 찾기가 쉽지 않다. 앞비파마을에서 한옥 찻집 뒷길을 따라 올라갔다. 비파골은 진신석가가 산다는 비파바위에서 유래됐다. 이곳에는 4개의 절터가 있는데 도로에서 가까운 순서대로 번호를 매겼다. 제1사찰터는 풀무사지, 제2사찰터는 잠늠골절터다. 잠늠골절터에 3층 석탑이 있다. 고졸하고 소박한 탑이다. 산 아래 내남 들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들판에서도 탑이 보인다. 들판에서 밭 갈던 신라인들이 밭 갈던 자리에서 탑을 향해 두 손만 모으면 그 자리가 법당이 될 터이다. 탑 너머로 보이는 일몰이 장관이다. 잠늠골절은 석가사와 불무사를 수호하기 위해 지은 절이라는 설도 있다. 효소왕이 비파암 아래 지었다는 석가사터는 제3사찰터, 부처가 사라진 곳에 세웠다는 불무사는 제4사찰터이다. 석가사터에는 절의 흔적이 계곡과 산에 산재해 있다. 불무사터는 찾지 못했다. 비파암도 볼 수 없었다. 길이 가파른 데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산길이라 등산이 어려웠다. 떡갈나무 잎으로 뒤덮인 산길은 눈길처럼 미끄러웠다. 결정적으로 겨울 해가 짧아 하산을 재촉했다.

효소왕이 비파암 아래 지었다는 석가사지 석탑부재.

미켈란젤로는 조각을 돌 속에 갇혀있는 어떤 형상이 그 모습을 잘 드러내도록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작업이라고 했다. 신라사람들은 바위를 부처님이라고 여겼다. 미켈란젤로처럼 돌 속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면 부처님이 되는 것이고 그냥 바위 상태로 두면 부처님이 돌 속에 숨어있다고 믿었다. ‘불무’는 부처님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바위가 있는 곳 어디에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라인들이 남산을 땅 위에 세워진 불국토로 여긴 까닭도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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