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흘러내리는 계곡물이 조요한 산속 아름다운 선율을

봄이 내려앉는 산사에 고요한 적막이 깃든 풍광이 평온 모습으로 산객을 맞는다.

설 명절 연휴라고는 하지만 끝나지 않은 코로나 바이러스감염증 예방과 확산방지를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명절 분위기를 느끼지도 못한 채 집안에서만 보내다 연휴 끝자락에 영천 은해사에 있는 운부암(雲浮庵)에서 정초 참배를 겸한 마음 다스림을 위해 집을 나섰다. 포항에서 1시간이 채 걸리지 않은 거리라 서둘 일 없이 차를 몰아 은해사 주차장에 닿았다. 너른 주차장에 차량이 별로 없다. 출발할 때 봄을 알리려는 봄비가 흩날리더니 그치고 하늘이 조금씩 열리고 있다.

봄이 어디쯤 왔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어서 빨리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스한 봄볕을 맞고 싶어 봄이 오는 산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어졌다.

은해사 일주문 모습.
은해사 산내 암자로 가는 이정을 알리는 안내판.

우리지역 최고의 명산 팔공산 자락에 위치한 은해사(銀海寺)는 불교 조계종 제10교구 본사로 신라 헌덕왕 원년에 해안사(海眼寺)란 이름으로 창건되어 조선조 명종 원년(154년) 천교화상(天敎和尙)이 지금의 터로 옮겨 은해사로 이름을 바꾼 신라 천 년 고찰로 천 년이 넘는 거조암을 비롯해 백흥암, 운부암, 백련암, 묘봉암, 중암암, 기기암, 서운암 등 8개 암자가 있는 대가람이다.
 

은해사주차장이 있는 광장에 음악분수대와 별조형물이 영천을 알리고 있다.

주차장 주변이 많이 바뀌었다. 너른 주차장과 광장이 들어서고 일주문까지 반듯하게 넓은 도보길이 만들어졌으며 양편으로 잔디밭과 나무숲이 조성되어 경관이 엄청나게 좋아졌다. 광장 한가운데 음악분수대가 있고 별빛고장 영천을 상징하는 별 조형물이 찾는 탐방객을 반갑게 맞는다.

일주문 주변에는 노송들이 숲을 이루고 문안의 사천왕들이 눈을 부라리며 사찰에 들어오는 악귀(?)을 막고 있는 듯 서 있고 일주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는 첫머리에 울창한 숲이 조성되어 있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나오는 솔숲을 일컫는 금포정 안내판.

이 숲길이 보화루(寶華樓)까지 이어지고 숲의 이름을 ‘금포정(禁捕町)’이라고 부르며 접근을 막을 정도로 보존하고 있다. 약 300년생 10여m 높이 송림이 2㎞ 정도 울창하게 들어서 있어 은해사의 장엄한 사찰 분위기를 더욱 짙게 느끼게 한다.

금포정 숲 길가 바위에 올려놓은 조그마한 돌들이 비를 머금은 채 탐방객을 맞이하고 ‘사랑나무’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는 100년 묵은 참나무와 느티나무의 사랑이 참으로 기이하다. 보화루(寶華樓)앞으로 흐르는 개천물이 얼음장 사이로 봄을 알리며 흐르고 있는 따사로움이 보인다.

은해사 법당은 하산길에 들르기로 하고 곧장 운부암 방향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은해사에서 운부암까지 3.5㎞라는 입간판을 따라 평탄한 포장길을 걷는다. 산속의 맑은 공기와 자연을 즐기며 힐링하는 것이 ‘걸어서 자연 속으로’의 참뜻임을 늘 간직하며 오늘도 자연 속으로 걸어간다.

신일지 호수에 내려앉은 산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있다.
신일지 호숫가에 앉아 잔잔한 물결을 바라보는 한 쌍의 남녀 모습.

포장길을 따라 걷다가 왼쪽 산속 오솔길이 나 있어 조금 걸어나가니 금새 포장로와 만난다. 잠깐이었지만 산길이 좋다. 길 왼편에 산자락을 끼고 너른 저수지가 나온다. ‘신일지(新日地)’라 불리는 저수지가 봄비에 젖어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이 조용한 수면에 산 그림자를 서럽게 그리고 무심히 물결을 바라보는 남녀 한 쌍이 그림처럼 앉아있다. 저수지가 있는 포장길 왼쪽으로 800m 지점에 조선 제12대 왕인 인종대왕의 태(胎)를 봉안한 곳이라는 ‘영천 치일리 인종태실’이 있다고 안내하고 있다. 어떻게 이곳까지 와서 태실을 만들었을까 의아하기도 하지만 그 옛날 풍수지리에 의한 믿음이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쉬엄쉬엄 오른다. 운부암까지는 2.5㎞를 더 가야 한다. 비에 젖은 나뭇가지가 곧 찾아올 봄 때문에 곱게 빗질하고 기다리는 여인네처럼 단아한 모습을 보인다.

운부암으로 가는 길에 쌓아논 돌탑이 정겹다.

길가에 쌓아 올린 돌탑들이 ‘운부암 가는 길’을 심심찮게 만들고 외롭게 서 있는 나목(裸木)들을 위로한다. 길가의 바위와 짝을 이룬 나무 등걸 의자가 길손에게 휴식을 안겨주고 천천히 흘러내리는 계곡 물이 조용한 산속에 아름다운 선율을 선사한다.

은해사에서 운부암을 거쳐 신원리캠핑장까지 가는 7.7㎞ 구간을 ‘팔공산둘레길 13구간’이라 부른다. ‘팔공산둘레길’은 16개 구간으로 나뉘어 팔공산(1,192m)둘레를 한 바퀴 도는 총 108.5㎞로써 제10구간부터 14구간까지가 영천 구간으로 치산관광지, 부귀사, 신원리캠핑장 은해사를 둘러 갓바위 입구 삼거리까지를 아울러는 코스를 포함하고 있다. 팔공산둘레길을 걸어보는 것도 보람되고 즐거운 도보여행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고장에 이렇게 훌륭한 산속 둘레길이 있음에 감사하고 도보여행객들에게 흔쾌히 권할 수 있어 좋다. ‘운부암 가는 길’이 포장길이라 조금은 불만이지만 차량통행이 거의 없고 호젓하게 걸을 수 있어 편안한 트레킹을 할 수 있다.

운부암 입구에 세워진 운부선원 표지석과 멀리 보이는 달마대사의 입상이 보인다.
운부암 입구에 세워진 바위위에 자그마한 돌을 올려놓아 산객을 반긴다.

운부암을 500m 정도 앞두고 좌측으로 제13구간 끝 지점인 신원리캠핑장으로 갈리는 길이 나오고 길가에 기이하게 굽어 눈길을 끄는 나무가 있어 사진으로 남긴다.

운부암 갈림길에 보이는 휘어진 나우가 이채롭다.

운부암 초입에는 자그마한 연못이 있고 너른 바위 곁에 의자가 놓여 있어 연못을 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를 한듯하다. 기이하게 소나무 허리를 휘감은 가지가 더는 뻗어나지 못하고 잘린 모습이 신기하게 보이는 길을 따라 ‘운부선원(雲浮禪院)’ 표석을 지나 암자 앞으로 다가간다. 또 하나의 연못이 나오고 바위에 세워진 달마대사의 입상이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두 눈을 부릅뜬 채 험상궂은 얼굴이 속세의 떼 자국에 절은 속인(俗人)을 나무라듯 당당한 자세로 쳐다본다.

운부암 불이문 양편 기둥에 새겨진 글귀가 이채롭다.

그 곁으로 조그맣게 만들어진 ‘불이문(不二門)’이 절집을 들어서는 길손에게 정중히 전한다. “탐진치심 무거우니 내려놓고 오시고, 번뇌망상 장애 꺼린 연못에 두고 가소” 모든 근심 걱정 털어버리고 둘이 아닌 하나 되는 마음으로 오라는 말인 듯 불이문을 열어준다. 단청을 입히지 않은 고색창연한 보화루(寶華樓) 앞에 무서운 눈망울과 사나운 이빨의 돌사자가 양편에 서서 절집을 막강하게 지키고 있다.

여느 절집보다 더 신비로움을 간직한 운부암의 첫인상이다. 팔공산에서 가장 명당자리라고 알려진 게 그냥 한 말은 아닌 것 같다. 유명한 고승(高僧)들이 수행했다는 운부암의 기(氣)가 느껴진다.

석사자상이 버티고 있는 입구를 지나 원통전이 조용히 산객을 기다린다.

보화루를 지나 원통전(圓通殿)앞 석탑에 또 하나 자그마한 청동 조각에 놀란다. 잔뜩 웅크린 채 앉아 있는 기이한 노승(老僧) 모습이 예사롭지 않고 겨드랑이에 꽂은 지폐와 바닥에 놓아둔 동전, 그 아래 나무판에 불산 주지스님이 쓴 글 또한 범상치 않다.

운부암 원통전앞 석탑에 놓인 청동조각 노승의 모습이 기이하다.

- 우째왔노! 이 몸은 늙어지만 니, 또한 이래된다. 방일, 하지말고 공부 하그라. 세상은 온통 불타고 있다. 어서, 是甚?(시심마), (이뭣꼬) 하그라, -

곰곰이 새겨보면 시사(示唆)하는 바가 큰 것 같다. 원통전에 주불(主佛)로 모셔 놓은 금동보살좌상은 보물 제514호로 지정된 조선초기의 보살상으로 화려한 장식이 돋보인다. 금동보살좌상 앞에서 한 해의 소망을 빌며 삼배(三拜) 드리고 물러나 뒤돌아본 절집이 창건 당시 상서로운 구름이 서려 이름 지었다는 ‘운부(雲浮)’처럼 희뿌연 운무가 고즈넉한 암자를 감싸 돈다. 때마침 내리는 이슬비에 젖은 목련이 꽃망울을 내밀며 봄이 오고 있음을 알린다.

다시 발길을 돌려 은해사로 내려온다. 3시간여를 산속 암자를 찾아 거닐다 속세로 나오는 속인이 마음의 떼가 조금은 가신 듯 후련해진다.

운부암 가는 길은 가을 풍경도 좋을 듯하다. 다시 한 번 찾고 싶어진다.

산사(山寺)에서의 한나절로 봄을 찾아 ‘걸어서 자연 속으로’ 떠난 ‘힐링 앤 트레킹’ 스물세 번째 이야기를 여기서 마무리한다. 

글·사진 =김유복 전 경북산악연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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