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20세기 미국 작단을 대표하는 토머스 울프의 소설에 <그대 다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부재(不在)하는 고향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바탕으로 당시의 시대상을 여실히 담은 작품입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가 폐결핵으로 38세의 나이로 죽은 뒤 2년 뒤에야 출판될 수 있었습니다. 그 전 작품 <천사여 고향을 보라>가 그에게 선사한 ‘상처뿐인 영광’ 때문이었습니다. ‘고향의 분노’가 가라앉는 데에는 10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발가벗겨진’, 그 자전적 소설의 등장인물들(고향사람들)의 격분은 대단했습니다. 이 소설은 7년 동안이나 고향마을 공공도서관의 금지서적이 되어야 했습니다. 작품의 문학성이 널리 공인받고, 공적 영역에서의 문학의 책무와 가치에 대한 이해가 고향마을에 전달되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사실, 울프 이전이나 이후에도 “고향에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몰랐단 말이야?”라고 되물었던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도 그 중의 하나였고 우리시대를 ‘고향상실의 시대’로 본 하이데거의 휠덜린 시(‘귀향’) 해설도 그 중의 하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시인 정지용도 시 ‘고향’에서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라고 노래했습니다. 근자에는 소설가 이문열도 그 비슷한 이야기를 했고요.

사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나 안타까움은 한 개인의 정서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런 회귀의 욕망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신화문학론에서 자주 언급하는 ‘낙원 회복의 주제(모티프)’라는 것도 결국은 ‘고향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세속의 현장, 소외의 공간인 도시에서 자란 자들은들은 그래서 귀소(歸巢) 욕구가 한 곳으로 한정되지 않고 이리저리 부유(浮游)합니다. ‘돌아가고 싶은 염원’이 고향이라는 특정 공간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오래 기억에 남는 특정한 시절(時節)에 대한 그리움만 애틋합니다. 얼마 전에 읽은 친구의 작품에서도 그런 허전한 심사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스물세 살부터 스물다섯 살까지 동부전선에 있었다. 그곳을 떠나온 뒤 한 세대가 거의 지난 어느 해 겨울, 다시 가보았다. 풍문으로는 들었는데 가보니 정말 민간인 통제선이 없어지고, 해안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서화와 돌산령의 검문소도 사라졌다. 해안 마을은 제4땅굴 관광지가 되어 있었다. 그 땅굴은 우리가 근무하던 때 이미 그 징후를 발견해 상부로 정보 보고를 했지만 묵살되었던 곳이다. 휴전선에 붙은 205GP(경계초소)는 민간인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을지전망대로 바뀌었다. <중략> 1970년대 후반, 분홍빛 꿈으로 아롱져야 할 청춘을 소리 없이 떠나보냈던 그 시절은 이제 오래된 흑백 사진 속에 남아 있다.” [문형렬, 『어느 이등병의 편지』]


젊어서의 군대 이야기가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부럽습니다. 운 좋게 사관학교 교관으로 군복무를 마친 제게는 그런 애틋한 시절이 없었습니다. 친구가 쓴 소설이나 시를 읽을 때는 우정이 늘 훼방꾼이 됩니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좀 더 서로의 문학에 가까이 갈 기회를 잃곤 했습니다. 이제 젊은 날 짧은 밤을 새며 나누었던 속된 우정들이 그리움으로 우화(羽化)되는 나이입니다. 『어느 이등병의 편지』가 우리 세대의 그리움의 실체를 속속들이 정치(精緻)하게 소환해 주기를 갈망하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입니다. 문학 덕분에 우리는 너무 일찍 세상을 등졌습니다. 일찍 너무 많은 것들에 대해서 썼습니다. 이제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우리의 젊은 시절, 난폭한 현실 앞에서 속절없이 떠다니던, 그 부박했던 짧은 밤과 연애들이, 실은 가장 아름다운 인생극장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