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제의 지혜·의지 담긴 '말 무덤'에 미움·원망·비방 묻었다

경북예천군 지보면 대죽리 마을전경. 이 마을에는 146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이상만 기자

코로나19가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봄이 오는 소리가 지천에서 들려오고 따사로운 햇볕과 함께 우리의 눈을 맑게 하는 꽃들과의 만남이 즐겁다.

봄의 정취와 함께 인간사의 가장 중요한 말(言)에 대한 교훈을 주는 대표적인 마을이 있다.

경북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400~500년 전 만들어진(추정) 타는 말이 아닌 입에서 나오는 말(言)을 묻은 무덤 (言塚·언총) 이 있다.

마을 입구의 대죽리 명소를 알리는 안내도

예천에서 신도시 호명면을 지나 안동시 풍천면 구담면과 경계를 이루는 지보면 대죽리는 아담하고 고즈넉한 조용한 마을이다. 외부인의 발길을 재촉해서 오란 듯 마을 입구는 단정하게 꾸며져 있어 여느 고향 집으로 들어서는 분위기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선비들이 대나무처럼 꼿꼿하게 절개를 지키며 은둔한 곳이다.

대죽리에는 매죽헌, 퇴계 이황 외가터, 만죽정, 유일한 박사 생가, 영모정, 쌍효각, 쌍호재각 등이 있다.

이곳은 퇴계 이황의 외가가 있던 곳으로 이황이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황의 외조부는 지보면 대죽리 출신 춘천 박 씨 박치(朴緇)이다. 자는 현명이다. 후손은 상주시 사벌면에 많다.

유일한 박사의 생가. 이상만 기자

임진왜란 때 의병장 이개립(1546년 ~1625년)과 죽림 권산해(1403~1456)의 고향이기도 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며 기업인들의 모범이 되는 유한양행 창업자인 유일한 박사의 생가가 있다.

유일한 박사는 유한양행과 학교재단 유한재단을 설립했다. 기업을 운영하며 얻은 이익을 인재 양성 및 교육 사업에 투자했고, 세상을 떠나며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했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가로도 활동했다.

말무덤의 정자에서 바라본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 마을 전경. 이상만 기자

 △ 선현들의 지혜를 오롯이 품고 있는 땅 ‘대죽리’.

대죽리는 남으로 길게 흘러내린 낮은 언덕배기 논밭을 사이에 두고 두 마을로 갈라진다. 이곳에 말 무덤이 있다.

이 마을에는 춘천박씨·김녕김·밀양박·김해김·진주류·경주최·인천채씨 등 많은 성씨들이 살았는데 문중 간의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고 한다. 사소한 말 한마디가 큰 싸움으로 번지는 등 말썽이 잦자 마을 어른들은 그 원인과 처방을 찾기에 골몰했다.

대죽리 마을의 말 무덤은 현대를 살아가는 말 많은 인간속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으면서도 반대로 참고 절제하려는 지혜와 의지의 소산이다. 이상만 기자

그리고는 마을 사람 모두에게 사발을 하나씩 가져오게 한 뒤 주둥개산에 큰 구덩이를 파놓고는 “서로에 대한 미움과 원망과 비방과 욕을 모두 각자의 사발에 뱉어놓으라”고 했다. 싸움의 발단이 된 말(言)들을 사발에 담아 깊이 묻은 말 무덤을 만든 것이다. 이런 처방이 있는 뒤부터 싸움이 없어지고 지금까지 두터운 정이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주둥개산은 옥대형 원방산의 왼쪽 줄기, 즉 좌청룡 지맥 끝 산이다. 원래 이름은 ‘주등포산(舟登浦山)’이다. 말 그대로 ‘배를 타는 개(강이나 내에 조수가 드나드는 곳)가 있는 산’이라는 뜻이다.

강촌이었던 대죽리는 신풍제방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큰물이 질 때 주등포산 턱밑까지 강물이 닿은 곳이었다. 사람들은 거기에서 배를 타거나 내렸다. 지금 대죽리의 바깥들 이름은 웃개들과 아랫개들이다. ‘개’가 ‘견(犬)이 아닌 ’포(浦)‘의 의미로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주등포산’이 사람의 입을 거치면서 어떻게 변했을까. 네 글자 한자 중에서 가장 먼저 바뀐 게 바로 ‘포’다. 그것이 맨 먼저 순 우리말 ‘개’로 바뀌었다. 그리되면 ‘주등포산’이 ‘주등개산’이 된다. 그리고 ‘주등개산’이 자칫 잘못 발음되면 ‘주둥개산’으로 바뀐다. 이 ‘주둥개산’에서 ‘개(浦)’를 ‘개(dog·犬)’로 바꾸면 ‘주둥개산’이 되고 거기에서 최종적으로 의미를 확대 해석해 버리면 ‘개 주둥이 산’이 된다.

이 곡해된 ‘주둥개산’을 본래의 ‘주등포산’으로 일찍 바로잡았더라면 ‘개 주둥이’ 이야기는 아마도 ‘말무덤’ 조형물만 남긴 채 오래 전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것이다. 그저 한 과객이 ‘주등포산’을 ‘주둥개산’으로 오해하여 마을 터 전체를 ‘개 주둥이’ 형상으로 잘못 말함으로써 생긴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났을 것이다.

마을 주민들이 그래도 그의 말 같잖은 처방책을 받아들여 말무덤을 만든 것은 그만큼 ‘말싸움 동네’라는 오명을 벗어버리고자 하는 강한 염원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그 산에 ‘말무덤’을 만들어 압승함으로써 이제는 더 이상 주민들끼리 말싸움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믿게 됐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말무덤은 말무덤 대로 기능하고, 또 ‘옥대형’ 내지 ‘풍취나대형’이라는 전통적인 명형국지 정체성도 그대로 온전히 전승돼 내려왔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주민들은 ‘주둥개산’을 ‘개 주둥이 산’으로 인식하는 것을 너무 긴 세월 동안 그대로 방치해 버렸다. 그 결과는 너무나 참담하다. 불과 이삼십 년 전부터 원방산의 왼쪽지맥은 곧게 뻗은 개의 아래턱 모습이고, 우백호는 구부러져 길게 뻗은 위턱의 형상으로 마치 개가 짖어대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마을의 안녕을 위해 개가 짖지 못하도록 앞니에 재갈을 물리고 송곳니를 누르는 돌을 세웠다고 하는, 실로 괴상망측한 풍수설이 나돌기 시작한 것이다.

‘위턱’, 아래턱‘, ‘재갈’, ‘송곳니’ 같은 말은 애초의 말무덤 전설에는 나오지 않던 말이다. 아마도 나쁜 기운을 누르는 풍수의 압승(壓勝) 내지 염승(厭勝) 술법을 아는 현대의 어떤 반풍수가 실상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주둥개산’ 전설에 자신의 생각을 마구 덧붙여 자의적으로 해석을 해버린 듯하다. 

말(言)무덤(言塚.언총).이상만 기자

 ‘구화지문, 설참신도’(口是禍之門, 舌是斬身刀)입은 재앙의 문이고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라는 뜻이다.

말을 조심하라는 뜻이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한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한번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말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남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기도 하고, 평생 잊지 못할 희망을 주기도 한다.

대죽리 마을의 말 무덤은 현대를 살아가는 말 많은 인간속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으면서도 반대로 참고 절제하려는 지혜와 의지의 소산이다.

대죽리 마을은 토양이 비옥해 농사가 잘되고 낙동강이 굽이쳐 흐르는 곳으로 배산임수를 갖춘 명당이다.

말무덤 주변돌에 새겨진 글귀.

대죽리가 속한 지보면의 사람들은 기가 세다. 선현 때부터 내려온 그 강한 기로 학자와 관인, 선비, 우국지사 등 유명인물들이 많이 배출됐다. 정사(鄭賜1400~1453), 정사용(호음·1491~1570),국문학의 태두 도남 조윤제 박사(1904~1976)를 비롯한 현석호 전 국방부 장관, 유학성 전 장군 등 많은 정치·경제·장성의 인물들이 배출된 곳이다.

본디 대죽리(한대)는 용궁현으로 속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암천리 일부를 병합해 대죽리라고 했다. 대나무가 무성한 곳이라 하여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예부터 우리나라의 십명지로 전해 오는 마을이다. 봉두령을 주봉으로 남쪽에 원방산이 있고, 동쪽은 주등포산 이 좌청룡을, 서쪽은 앞 남산이 우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 낙동강이 흐르는 삼태기 형으로 된 정남향의 아늑한 마을이다. 현재 대죽리에 사는 주민은 146명이다. 면적은 3.04㎢이다.

대죽리에 사는 유일한 박사의 일가 친척인 유승대(81)씨는 “유씨 성을 가진 주민이 20여 가구 정도가 살았었는데 지금은 다 떠나가고 4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며 “우리 동네는 퇴계 이황 선생의 외가 터가 있고 유일한 박사의 생가, 말(言) 무덤 등이 있어 유명관광지는 아니지만, 간간이 찾아오는 이가 많다”고 말했다.

이상만 기자
이상만 기자 smlee@kyongbuk.com

경북도청, 경북경찰청, 안동, 예천 담당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