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유희하는 인간)에 대한 관심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이미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슬기로운 사람)와 함께 현대 인류를 규정하는 핵심 개념이 되어 있습니다. 어려운 이야기는 차치하고(우리말 ‘놀다’는 ‘건들거리다’, ‘여유가 있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살아보니 ‘노는 인간’이 중요하다는 걸 알겠습니다. 놀 줄 모르고 맹꽁하니 공부만 하던 친구들은 지금도 꼭 그 모양입니다. 재벌처럼 돈을 크게 번 것도 아니고, 대통령이나 되어서 큰 권세를 휘두르는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동네 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으며 뿌듯하게 사는 것도 아닙니다. 유명한 저술가나 모험가나 예술가나 스포츠인도 없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그토록 가지고 싶어 했고 쌓아두고 싶어 했던 것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가며 고만고만하게 늙어가고 있습니다. 돈이든 명예든 권세든, 늙음 앞에서는 부질없는 소꿉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실히 깨닫는 중입니다.


노는 일에 대해서 좀 관대해지자는 말씀을 드리려고 우정 좀 과장된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놀던 품새가 있다’, ‘잘 노는 놈이 공부도 잘한다’, ‘놀 때는 놀고 일할 때는 일해야 능률이 오른다’, ‘놀멘(놀면서) 놀멘 해야 지치지 않고 오래 할 수 있다’, 주변에서 자주 듣는 ‘놀다(play)’와 연관된 말들입니다. 얼마 전에, 외국에 나가 있는 가까운 친구의 딸내미가 ‘평생을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라고 말한 것이 부모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노는 일과 생계를 잇는 일을 하나로 만들겠다는 당찬 각오였습니다. 일하면서 스트레스 받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그 말을 전하면서 친구는 헛웃음을 날렸습니다. 지금껏 들어간 돈도 숱한데 앞으로 또 얼마나 갖다 쓰려는지 모르겠다며 껄껄 웃었습니다. 노동과 놀이가 하나 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저도 젊어서 그런 선택을 했었습니다. 당시 제게는 문학이 가장 큰 놀이터였습니다. 결과만 두고 보면 그때의 제 선택이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놀이’의 선택이 어떤 의미인지 잘 설명하고 있는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위기에 처한 모든 사회에서 아이들은 언제나 가장 먼저 최악의 위협을 기본적인 놀이 형태로 통합해 낸다.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었을 때 아이들은 「빙빙 돌아가는 로지 Ring Around the Rosie」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거리를 메운 홍반의 사람들, 악취 위장용 ‘꽃다발’, 화장되는 시체 더미들을 의례화했다. ‘잿더미, 잿더미’라는 단순한 후렴구가 나오고 ‘우리 모두 쓰러지네’라는 솔직하고 직설적인 표현으로 노래는 끝난다.” [더글러스 러시코프(김성기·김수정), 『카오스의 아이들』 중에서]


‘평생을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라는 아이들의 바람이 좀 더 격려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그런 꿈을 버리고 우리 세대가 살아왔던 것처럼 돈과 권력 앞에서는 모든 것을 다 버리는 인생을 살아간다면 세상은 더 이상 바뀌지 않습니다. 돈과 권력 이외에도 인생을 채워주는 게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만 해도 기특한 일입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삶’이 모든 장래 선택의 첫 번째 항목이 되어야만 좋은 세상인 것입니다. 놀이꾼들에게는 무슨 일이든 즐기면 놀이가 됩니다. 의무감에서 해방되어 혼자서든 남과 함께 든 즐겁게 놀면 놀이가 됩니다. 그런 식이라면 그 높은 대통령직도, ‘갖고 놀면’ 놀이가 됩니다.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하려다 비극적으로 돌아가신 전직 대통령을 생각하면 말이 쉽지 그렇게 즐거운 세상은 다시 오기 힘들 것 같기도 합니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