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미쳐야 미친다’(不狂不及)라는 말이 있습니다. 미친 듯이 몰두하지 않으면 원하는 경지에 오를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해는 금물입니다. 아무리 미친 듯이 온갖 열정과 갖은 노력을 쏟아 부어도 안 되는 일은 안되는 법입니다. 그러니 몸을 던져 열심히 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해야 할 일이 “되는 일인가 안되는 일인가?”를 판단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 자신을 알라”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다음에 할 일은 또 무엇일까요? 노력의 방향이겠죠?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 잘 살펴야 합니다.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를 잘 가늠해야 합니다. 방향이 정해지면 그다음은 속도입니다. ‘오래달리기’에는 속도 조절이 꼭 필요합니다. 가부 판단, 방향 설정, 속도 조절. 이 세 가지 선행 조건이 충족되면 ‘미쳐야’ 합니다. 그러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 인력(人力)의 한계에 봉착할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럴 때는 하늘의 도움을 기다려야 합니다. 계시(啓示)로 오거나 시절(時節)로 오거나 예기치 못한 미래가 나를 찾아올 수가 있습니다. 그때 그것에 순응하면 됩니다. 한평생 살아보니 그 마지막 화룡점정(畵龍點睛)의 순간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 ‘별의 순간’(이 말은 정치권에서 빌려온 말입니다)을 아는 일도 최선을 다해 ‘미쳐 본 자’들에게만 허용되는 것은 물론입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이건 아닌데 싶으면 가차 없이 돌아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머리 박고 죽는’ 일이 생깁니다. 운이 좋아 높이 올라가도 결국 항룡유회(亢龍有悔), 후회만 남습니다.


몰락한 하급 귀족 출신의 노인이 있었습니다. 이름은 돈 알론소. 쉰을 넘긴 나이인데 기사(騎士)소설을 너무 많이 읽어서 살짝 맛이 가 버렸습니다. 어느 날 그는 소설 읽기로 만족을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기사가 되어 세상을 바로잡기로 결심을 합니다. 아마 전(前)전두엽에 무슨 문제가 생겼던 모양입니다. 현실과 문자기록(문학작품) 사이에는 엄연한 경계가 있는데 그것을 아예 무시해 버립니다. 미친 거지요. 평균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로 들어가 버린 거지요. 돈키호테의 어처구니없는 여정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습니다. 여인숙을 성(城)으로 착각하고, 여인숙 주인을 성주라고 부르고, 옆방의 매춘부를 귀부인으로 대접하기도 하지요. 양떼와 포도주 부대 자루를 적의 군대라고 우기는가 하면, 풍차를 전설 속의 거인이라고 생각해서 무작정 덤벼들기도 합니다. 그는 자기 식 모험을 통해서, 진지한 방식으로, 자신의 몽상과 광기를 세상에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결과는 너무나도 비통한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세 번째 출정 이후 고향에 돌아온 돈키호테는 앓아눕게 됩니다. 이성을 회복한 후 큰 후회 속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뜻있는 자들은 대체로 40에 ‘나’를 바꾸려 하고, 50에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나’는 몰라도(그것도 힘이 많이 듭니다) ‘세상’을 바꾸기는 참 어렵습니다. 편차는 있겠습니다만, 돈키호테를 답습하는 건 그야말로 시간문제입니다. 내 안의 변화 욕망이 바로 돈키호테라는 것을 아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립니다. 현실과 부딪히며 자신을 알아가는 편력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다만 옛 성인이나 역사 속의 영웅들은 좀 다릅니다.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압니다. 그래서 소인들이 보기에는 자작 ‘하늘에 머리를 박고 죽는 길’을 택합니다. “사랑이여 아득한 적이여, 너의 모든 생명의 함대는 바람 불고 물결 높은 날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오라. 오라, 내 거기서 한줄기 일자진(一字陣)으로 적을 맞으리”라는 이순신 장군의 말(김훈, 『칼의 노래』 서문)이 바로 그들 ‘운명을 아는 자’들의 심사를 잘 대변하는 말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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