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병진 경주지역위원회 위원
서병진 경주지역위원회 위원

중국사에 등장한 첫 번째 여장부가 여태후다. 사마천이 ‘여태후본기’에서 강직하고 굳세다고 한 여인이다. 아버지 여공은 딸의 비범함을 눈여겨보아 귀인에게 시집보내리라 마음먹고 있었는데 패현에서 건달에 가까웠던 유방을 보고 단박에 딸을 시집보낸다. 그러나 딸이 귀인이 되기까지는 힘겨운 투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유방이 하급관리일 때 아이들을 데리고 혼자 농사를 지었고, 항우와 치열하게 싸울 때는 포로가 되었다가 평화협정이 체결되면서 석방되는 고초를 겪는다.

여태후의 진면목은 한나라 개국 후에 드러난다. 일등공신 한신과 팽월을 제거하여 고조(유방)의 부담을 덜어주었으며,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자들을 없애버린다. 아들 혜제를 지켜내기 위해 신하들의 간쟁을 막후조정하고, 책사 장량을 동원하여 아들 혜제를 기어이 즉위시킨다.

여태후는 권력투쟁을 막고 안정적으로 나라를 이어갈 수 있게 하려고 적장자인 아들을 즉위시켜야 했고, 그 아들이 나라를 유지해 갈 수 있게 잔혹하게 주변을 정리했다. 경쟁의 대상이 되었던 척비를 ‘돼지 인간’으로 만들고 눈알을 빼고, 벙어리, 귀머거리로 만들고, 처참하게 죽인다. “아들아, 권력은 이렇게 잔인한 것이다. 네가 이것을 견딜 수 있겠느냐? 권력은 우애 있는 형(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라고 일렀지만 효혜제는 굳세고 강건하지 못했다. 모후의 잔인한 섭정 밑에 깊은 상처를 입고 정사를 팽개치고 주색에 빠져 살다가 일찍 죽는다. 아들이 죽고 전권을 장악한 뒤 허수아비 황제를 둘씩이나 세우고 난 뒤에야 여태후도 죽음을 맞게 된다.

이렇게 잔인무도했지만 사마천은 “한나라의 불완전한 체제를 잘 정비하였고, 진나라로부터 내려온 악습을 폐지하여 여후의 치세가 천하를 태평하게 하였다”고 평가하였다. 중국의 3대 악녀가 한나라의 여태후, 당나라의 측천무후, 청나라의 서태후다. 세 사람이 모두 사악한 찬탈자였고 서태후는 다른 평가를 받고 있지만 여태후와 측천무후는 훌륭한 통치자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어쨌든 나라가 혼란할 때 권력을 거머쥐고 마음껏 누렸으며, 그 권력의 기반을 탄탄하게 하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점이 세 여걸의 공통점이다.

어느 정치인, 국회의원, 국무총리, 당대표 등 요직을 두루 거친 정치 지도자가 50년, 100년 정권 유지를 호언한 적이 있다. 정치가로서 지닐 수 있는 담대한 소신이다. 이를 위해서는 좋은 정책, 국가발전의 비전을 제시하여 나라를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모든 국민의 행복지수를 높여가야 할 것이다. 어떻게 여기까지 온 나라인가. 최빈국에서 한강의 기적을 일으켜, 세계 경제 대국의 반열에 들어선 나라가 되었다. ‘보릿고개’ 노래를 구성지게 불러재끼고,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는 시대가 되었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자식을 적게 낳자고 외쳤고, “새벽종이 울린다, 새아침이 밝았네”를 노래하고며 “1000불 소득, 백억 불 수출”을 믿고 허리띠를 졸라매었었다. 이제 온 국민이 함께 힘을 모아 새롭게 행복의 청사진을 마련하고, 자유민주주의를 구가해야 한다. 민주화의 고비를 넘어왔으니 온 국민이 행복한 삶을 누리며 문화를 창달해야 한다.

민주화 투쟁과 정권 쟁취과정에서 험한 입과 몸으로 공을 세웠던 투사가 평화안착의 시대에 반드시 유용한 인재는 아니다. 그래서 생긴 말이 토사구팽이다. 인재등용이 은혜갚음은 아니다. 요직(要職)을 맡겨서 마음의 빚을 갚아서는 안 된다. 한신과 팽월을 제거하여 고조(유방)의 부담을 덜어준 여태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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