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립아트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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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리퍼를 신을 때마다 슬리퍼처럼
편하고 만만했던 얼굴이 떠오른다
슬리퍼는 슬픈 신발이다
막 신고 다니다 아무렇게나 이곳저곳에
벗어놓는 신발이다 언감생심 어디
먼 곳은커녕 크고 빛나는 자리에는
갈 수 없는 신발이다
기껏해야 집 안팎이나 돌아다니다
너덜너덜해지면 함부로 버려지는 신발이다
슬리퍼를 신을 때마다 안개꽃같이
누군가의 배경으로 살았던
오래된 우물 속처럼 눈 속 가득
수심이 고여있던 얼굴이 떠오른다


<감상> 재벌도 노숙자도 슬리퍼를 신는다. 속되게 “쓰레빠”, “딸딸이”라고도 한다. 뒤축이 없이 발끝만 꿰게 된 신을 슬리퍼(slipper)라고 한다. “끌신”이라는 예쁜 우리말도 있다. 편하고, 만만하고, 막 신는 신발이 슬리퍼다. 시인은 슬리퍼를 신을 때마다 ‘누군가의 배경으로 살았던’ 수심 가득한 얼굴이 떠오른다고 한다. 우리가 ‘아무렇게나 이곳저곳에 벗어놓고’, ‘빛나는 자리에는’ 잘 데려가지 않았던 쓸쓸한 얼굴이, 나지막이 말한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오늘은 슬리퍼의 안부를 묻는 날이다. 안개꽃은 좋은 선택이 아니다. <시인 김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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