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왕사 벽화 속 개, 신라 천년왕조 패망의 경보 울리다

경주개 동경이. 삼국유사 의자왕 조에 들사슴같은 큰 개가 성을 향해 짖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사슴과 노루는 꼬리가 없는데 동경이 꼬리가 노루와 사슴을 닮았다고 해서  의자왕조에 나오는 개가 동경이 일수도 있다는 추정이 나온다. 사진제공 최석규 동국대교수
경주개 동경이. 삼국유사 의자왕 조에 들사슴같은 큰 개가 성을 향해 짖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사슴과 노루는 꼬리가 없는데 동경이 꼬리가 노루와 사슴을 닮았다고 해서 의자왕조에 나오는 개가 동경이 일수도 있다는 추정이 나온다. 사진제공 최석규 동국대교수

“AD 918년 사천왕사 벽화 속의 개가 짖었다. 3일 동안 불경을 독송한 끝에 개 짖는 소리를 멈추게 했다. 반나절이 지나자 개가 또 짖었다. 920년 봄, 황룡사탑의 그림자가 사지 벼슬을 하는 금모 집 뜰 안에 한 달 동안 거꾸로 서 있었다. 그해 10월에는 사천왕사 오방신의 활줄이 모두 끊어졌으며 벽화 속의 개들이 뜰 한가운데까지 달려 나왔다가 다시 벽 속으로 들어갔다” 『삼국유사』 ‘경명왕’조는 이렇게 81자의 짧은 기사로 처리했지만 기사는 암울하고 공포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때를 『삼국사기』는 “919년 사천왕사의 흙으로 빚은 상이 들고 있던 활의 줄이 저절로 끊어지고 벽화의 개가 소리를 냈는데 마치지는 것 같았다”고 전한다. ‘벽화 속의 개가 짖었다’는 단정적 문장과 ‘마치 개가 짖는 것 같았다’는 유보적 문장 사이에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시선이 확연히 갈린다. 일연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설화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반면 김부식은 이 황당한 이야기를 의심 가득한 시선으로 마주한다. 그 끝에 음습하고 불운한 기운이 가득한 이 사건을 ‘개가 짖는 것 같다’라고 기록했다. 일연은 기적과 신화가 현세적 삶을 바꾼다고 믿는 종교가였고 김부식은 유교의 ‘술이부작 (述而不作·기록하되 짓지 않는다)는 춘추필법을 구사하는 역사가이다.

경명왕 때 사천왕사 벽화 속의 개가 짖었다. 뜰 가운데로 뛰쳐나왔다가 다시 벽화 속으로 들어갔다. 사진은 발굴조사 중인 사천왕사의 귀부.

표현에서 차이가 있을지언정 두 사서가 전하는 메시지는 동일하고 명확하다. 개 짖는 소리는 멸망의 북소리였다. AD918년 유사와 919년의 사기 속 개는 ‘나라가 망한다, 나라가 망한다’며 경보를 울렸던 것이다. 개가 짖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메시지는 250여 년 전 백제가 망할 때 이미 학습했다. 백제 의자왕 때 일이다. “660년 들사슴과 같은 큰 개(有大犬如野鹿)가 서쪽에서 사비언덕에 이르러 왕궁을 향해 짖더니 잠시 후 어디론가 사라졌다. 성 안에 살던 개들이 길 위에 모여 짖기도 하고 울기도 하다 한참이 지나자 흩어졌다.” 『삼국유사』 ‘태종 춘추공’ 조사천왕사 벽화 속의 개가 짖은 뒤 17년 만에 신라가 망했다. 경명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동생 경애왕은 견훤의 공격을 받아 포석정에서 죽었고 경순왕은 견훤에게 목덜미 잡혀 왕에 오른 지 9년 만에 왕건에게 나라를 넘겨줬다.

다시 경명왕 시대로 돌아가 보자. 917년 아버지 신덕왕에 이어 왕위에 올랐다. 신덕왕은 제8대 아달라왕 이후 박씨로서는 728년 만에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경명왕이 왕위에 오른 다음 해에 사천왕사 벽화 속의 개가 짖었다. 사천왕사는 신라 시대 성전 사원 중 가장 격이 높았던 사찰 중 하나다. 당나라 수군이 신라를 침공할 때 문무왕이 비단으로 임시로 사천왕사를 짓게 하고 명랑법사가 문두루비법을 펼쳐 서해를 건너오던 당나라 군사를 수몰시킨 신라 최고의 호국 사찰이다. 그 절의 벽화에 그린 개가 짖어댔다. 개가 짖던 그해 일길찬 현승이 반란을 일으켰다. 박씨에게 왕위를 빼앗긴 김씨의 왕위 찬탈 시도였다. 이 와중에 왕건이 고려를 건국했다. 중국은 5대 10국 시대에 접어들었다. 당나라가 망하고 후량이 들어섰다가 16년 만에 망했다. 경명왕 재위 시에는 후당이 들어섰지만 국제정세도 불안불안했다.

경명왕 때 사천왕사 오방신의 화살 줄이 모두 끊어졌다. 사진은 경주국립박물관에 전시된 사천왕사 녹유신장상.

920년에 황룡사탑이 금모 사지의 집 뜰 안에 한 달 동안 거꾸로 서 있었다고 했다. 황룡사 탑은 선덕여왕 때 자장법사의 건의를 받아 건립했다. 황룡사 장륙상, 진평왕의 천사옥대와 함께 3대 보물이었다. 이 때문에 이웃 나라가 침범하지 못했다. 이어령은 황룡사 9층탑을 오늘날의 ‘통일문제연구소’나 ‘국가안전보장회의’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1층은 일보, 2층은 중화, 3층은 오월, 4층은 탐라, 5층은 응유, 6층은 말갈 7층은 단국, 8층은 여적, 9층은 예맥을 누르는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적진을 향해 제각기 방향이 설정된 현대의 미사일 기지 같다고 설명했다.(‘이어령의 삼국유사 이야기’) 그 황룡사 탑의 그림자가 한 달씩이나 거꾸로 비췄다.

불길한 징조는 이어진다. 그 해에 사천왕사의 오방신의 화살줄이 끊어졌고 벽화 속의 개가 튀어나왔다가 벽화 속으로 들어갔다. 사천왕사의오방신은 문두루비법을 시행하는 행동대장이다. 둥근 나무에 오방신의 이름을 적어 놓기만 해도 악귀를 쫓아냈다. ‘관정경’은 “오방신은 투구와 갑옷을 입고 활을 들고 화살을 지녔으며 각가 그 명위에 따라 오방에 둘러 있다”고 적고 있다. 화살줄이 끊어졌으니 방아쇠가 고장 난 총을 들고 있는 군인이나 마찬가지다. 개들이 또 벽화 속에서 나와 짓고 날뛰었다. 불경을 아무리 외어도 효험이 없다. 신라를 지탱하던 철학적 기둥,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가 더 이상 민중에게 희망의 메시지도 날리지 못하는 것은 물론 법률적 도덕적 카리스마를 상실했다. 기사만 보면 절이 온통 개가 날뛰는 개판이 됐다.

경명왕 때 황룡사 9층탑 그림자가 한 관리의 집 마당에 한달동안 거꾸로 서 있었다. 사진은 황룡사 역사문화관내에 있는 황룡사 9층 목탑 모형.

위기를 감지한 경명왕은 고려의 왕건과 손을 잡았다. 신라는 30년간 후고구려와 후백제를 반란세력으로 규정하고 일체의 교류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고려와 외교관계를 맺음으로써 통일신라 군주국으로서의 정통성과 상징성을 포기하는 결과를 낳았다. 스스로 후삼국 중 하나로 위상을 깎아내린 결정이었다. 견훤을 도발하는 정치적 행위이기도 했다. 이후 신라의 호족 장군들이 줄줄이 고려에 투항했다. 강주장군 윤웅을 시작으로 하지성장군 원봉, 명주장군 순식, 진보성장군 홍술, 명지성장군 성달과 경산부 장군 양문 등이 고려에 항복했다.

게다가 대야성을 후백제에게 뺏겼다. 이미 추풍령이 후백제의 땅이 됐고 죽령은 고려가 주인이었다. 옷으로 말하자면 외투와 와이셔츠까지 다 잃었는데 경명왕대에 와서 마지막 남은 속옷까지 벗겨진 셈이다. 신라는 벌거벗은 종주국이 됐다. 대야성을 잃음으로써 백제땅에서 대구와 경주로 오는 길은 고속도로가 뚫린 셈이다. 견훤이 뒤에 신라를 공격해 경애왕을 죽일 수 있었던 것도 대야성을 획득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경주 동남산 자락에 있는 삼릉. 맨 앞이 신라 8대 아달라왕릉, 가운데가 53대 신덕왕릉 맨 뒤가 54대 경명왕릉으로 추정된다.

경명왕은 그 와중에 매사냥을 즐겼다. 산에 가서 매를 놓았다가 잃어버리자 선도산성모에게 기도했다. “만일 매를 찾는다면 마땅히 신모께 작위를 봉해드리겠습니다.” 금세 매가 날아와 책상 위에 앉았으므로 성모를 대왕으로 봉하였다. 『삼국유사』 ‘선도성모’조.

왕도 신도 손발이 척척 맞아 유희에 넋을 잃었다. 경명왕이 왕위에 올랐을 당시 신라는 3, 4세기 사로국 규모로 쪼그라들었다. 국가의 중요기관에서 괴기한 일이 일어나고 곳곳에서 경고음이 울렸지만 추락하는데 탄력이 붙은 나라는 회생하지 못했다. 오직 믿을 곳은 중국뿐이었다. 이것도 만만치 않았다. 신라의 지방 호족들이 제 마음대로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경명왕은 924년 정월에 후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이에 뒤질세라 신라 호족중 하나인 천주절도사 왕봉규가 사신을 후당에 보내 방물을 바쳤다. 왕이 6월에 또 김악을 보내 조공했다. 8월에 왕이 죽었다. 왕위에 오른 지 8년 만이다. 그 후 경애왕과 경순왕을 거쳐 신라가 망할 때까지 개가 짖었다는 기록은 없다. 어떤 경고음도 없이 신라는 패망의 길로 치달았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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