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의 유명한 절, 희양산 봉암사는 일반인들이 평소에 출입할 수 없는 곳이다. 십여 년 전 사월 초팔일 부처님 오신 날에 답사한 적이 있다. 마침 지난 10월 말에 답사객을 따라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국보와 보물이 깊이 간직된 봉암사봉암사에는 귀중한 금석문이 여럿 있지만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여건이 아니어서 그 비중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않은 감이 있다. 1963년에 보물 제138호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국보 제315호로 승격된 지증대사적조탑비와, 1963년에 보물 제187호로 지정된 정진대사원오탑비가 있고, 아직 지정되지 않
좋아하는 글씨를 만나러 가는 것은 언제나 마음이 설렌다. 이미 몇 번 찾아가 사진도 찍고 글씨를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좀 더 세밀히 관찰하고 비석의 크기나 글자의 크기도 재어볼 요량으로 상신리로 향했다.길가에 있는 정려비각에 도착해 보니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비각 건물의 한쪽 지붕의 기와가 벗겨지고 둘러막은 나무 살대가 상한 채였다. 그럼에도 애초에 마을 사람들이 길가로 옮겨 지을 때 튼튼히 지었기에 든든히 버티고 있었다. △효자 정려비.비각 안에는 비교적 큰 정려비가 비각에 갇힌 느낌으로 서 있다. 비신의 크기는 길이가
양동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손소와 손중돈을 비롯한 양동 출신의 경주손씨 묘역이 있다. 크게 두 곳으로 나눠져 있는데, 그리 멀지 않은 거리다. 손소 이래 세거지인 양동마을에서도 가까운 도음산 자락에 있다. 양민공(시호) 손소와 부인인 정부인(貞夫人) 류씨 묘비 및 석인상은 2006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90호로 지정되었다. 경절공 손중돈 및 정부인 최씨의 묘비와 석인상도 같이 제391-1호로 지정되었고, 첫 부인 정부인 홍씨의 묘비와 석인상도 2007년에 제391-2호로 지정됐다.△양동마을 경주손씨양동마을의 손씨는 계천군 손소
△우연히 만난 승의랑 문중 묘역지난겨울 연재를 계획하고, 우선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을 답사하기로 했다. 흥해 곡강 주변의 ‘충비순량순절비’를 찾아가기로 하고 차를 몰았다. 흥해에서 곡강으로 들어가는 길의 양쪽 산이 곡강과 어우러져 절경이었다. 포항 가까운 곳에 이런 뛰어난 경치가 있나 감탄하고 보니, 이곳은 유서 깊은 곳이었다. 곡강을 사이에 두고 남·북미질부성이 있던 곳으로, 지금도 자취가 남아 있다.순절비가 있는 절벽에 이르러 자세히 살펴보고 촬영한 뒤, 강 건넛산을 바라보았다. 그리 높지도 크지도 않은 산이지만 오래된 유적이나
△처음으로 대각국사비를 찾다오랫동안 벼르고 별러 칠곡군 북삼읍에 있는 유적을 찾았다. 지루한 장마가 계속돼 도무지 갠 날을 만나기가 어려웠다. 마침 8월 마지막 토요일에 날씨가 맑다 하여 서둘러 출발했다. 일기예보를 반신반의하며 두 시간을 지나 북삼읍 숭오리에 도착했다. 금오산 자락인 마을에서 개울을 건너, 산 정상 쪽으로 5리 정도 올라가는 길이 꽤 험했다. 사전에 찾아본 자료에 따라 승용차를 몰고 올라가는데,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었다. 이윽고 상당히 비탈진 언덕에 초라한 절집이 보였다. 마당에 차를 대면서 살펴보니, 마침 절
경상북도엔 고려시대 석비가 여럿 남아 있다. 청도 운문사의 원응국사비도 그중 하나로 국가문화재인 보물 제316호로 지정된 지 오래다. 당연히 역사 문화적 가치가 크기 때문에 일찌감치 보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신은 덮개돌을 잃고 세 조각으로 깨진 것을 철제 보호구로 감싸 세워놓았다. 비신 앞면 상단에 해서로 ‘원응국사비명’이라 제액을 크게 새겼다. 이어 오른쪽 첫머리에 ‘고려국운문사원응국사지비’라 비제를 세로로 앞세우며, 원응국사(圓應國師) 학일(學一, 1052~1144)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하고 기리는 내용으
표충각(表忠閣)은 두촌 이팽수(1520~1596)의 정려비가 세워진 비각 건물이다. 경주시 안강읍 산대리 1565-1번지에 있어, 안강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옥산서원 방향으로 가다가 오른쪽 들판에 보인다.팔작지붕 단층 건물 안에 귀부와 이수를 갖춘 정려비가 있다. 조각은 소박하고 비각의 천장 가운데 커다란 연꽃을 새겼다. 천장과 비신 사이의 나무에 ‘忠臣 贈 嘉善大夫 兵曹參判 同知義禁府事 訓鍊院都正 李彭壽之門’이라 단정한 해서로 정려문구를 새기고, 끝에 ‘上之七年(정조7, 1783) 癸卯 十一月 命旌’이라고 정려받은 시기를 표했다.
법광사지는 포항시 북구 신광면 상읍리 비학산 자락에 있는데, 경상북도 기념물 제20호에서 2008년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 제493호로 승격 지정됐다.법광사지를 떠받치고 있는 자연부락이 끝날 즈음 흐트러진 당간지주가 있고, 그 위쪽으로 중심 불전 터로 추정되는 자리에 대형의 연화불상좌대가 지금까지 남아있다.그 자리에서 비학산 정상 쪽으로 두어 단 정도 올라가면 쌍신두귀부가 있다. 귀부의 오른쪽에 신라 26대 진평왕의 신위를 모신 숭안전이 있고, 왼쪽 약간 아래쪽에는 법광사지 3층석탑과 1750년 세운 석가불사리탑중수비가 있다. △법광
독락당은 보물 제413호인 국가문화재이며, 2010년 양동마을 일원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독락당은 사간의 직책을 맡고 있던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선생이 1531년 김안로의 재등용을 반대하다 좌천되자 낙향하여 증축한 일종의 별업(別業)이다. 회재는 10대에도 인근의 정혜사와 부친의 초막이 있던 이곳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는데, 40대에 7년 정도 독락당 일원을 경영하며 산수자연을 노래하고 학문을 닦으며 지냈다. 이런 과정에서 주변의 네 산과 계곡의 다섯 곳 반석에 이름을 붙이고 사산오대
경주시 안강읍에 있는 옥산서원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572년 세워졌다. 사적 제154호인 국가문화유산이다. 2010년에 양동마을 일원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으며, 2019년 한국의 서원 아홉 중 하나로 거듭 등재됐다.금석문을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편액(扁額)의 글씨도 넓은 의미로 금석문에 포함할 수 있다. 편액은 건물의 이름을 써서 내다 건 것이다. 건물 기둥에 내다 건 주련이나 시문, 기문 등을 판자에 새겨 내건 것은 편액까지 아울러 현판이라 한다. 편
숭복사비는 원래 현재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의 숭복사지에 헌강왕의 명으로 최치원(崔致遠, 857~908년 이후)이 짓고 써서 세운 비이다. 신라 하대를 연 원성왕과 경문왕계 왕실의 숭복사 중건에 따른 사적을 비에 담았다. 곡사(鵠寺)와 원성왕릉 및 숭복사에 대한 왕실의 관심과 건립에 대한 내력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최치원의 부친이 왕실의 일에 협력한 내력을 헌강왕이 거론하며 명을 내렸기에 최치원으로서는 더욱 정성을 다하여 비문을 짓고 글씨를 썼을 것이다. 최치원의 글씨는 그의 문장과 더불어 고려 전기까지 주요한 흐름으로 자리 잡아 나
흥덕왕은 통일신라에 재위한 제42대 국왕이다. 흥덕왕릉은 국가 사적 제30호로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에 있다. 왕릉은 왕비인 장화왕후와 합장릉으로 왕릉을 둘러싼 안강 소나무와 더불어 널리 알려져 있다.왕릉은 십이지신상으로 호석(護石)을 둘렀고 네 마리의 사자가 사방을 지키고 있다. 왕릉의 초입에 화표(華表)가 있고, 한 쌍의 무인상과 문인상도 왕릉을 호위하고 있다.왕릉으로 진입하는 오른쪽에 흥덕왕릉비의 받침돌인 귀부(龜趺)가 여기저기 훼손된 채로 남아 있다. 귀부는 봉분(封墳)과 함께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크기를 자랑한다. 수
경주에는 수많은 문화유산이 남아있다. 금석문도 예외가 아니다. 국보 25호로 지정된 태종무열왕릉비는 삼국통일의 초석을 쌓고 백제를 멸망시킨 뒤 전쟁의 와중에 세상을 떠난 태종무열왕의 능비이다. 이 비는 경주의 금석문을 대표할 만한 매우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석비의 형식이나 비액(碑額)의 새김이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것이며, 이후로 이를 전범(典範)으로 우리나라 석비의 형식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통일전쟁의 과정에서 당의 문화를 전격적으로 수용(受容)했지만, 서안비림이나 소릉비림의 당나라 비석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 최고의 걸작
△삼용추의 가장 오래된 기록지금까지 찾은 문헌 가운데 내연산 삼용추가 등장하는 가장 이른 것은, 조선시대 1530년에 발간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청하현 산천 조 신구산 항목에 삼용추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구산은 청하현의 북쪽 십 리에 위치한다. 삼용추가 있는데, 가뭄에 기도하면 응험(應驗)이 있다.(神龜山 在縣北十里 有三龍湫 旱禱在應)”고 하였다.신구산은 지금의 내연산 계곡 오른쪽 산으로, 보경사에 있는 ‘원진국사비문’에도 나온다. 이 기록은 지금의 내연산 삼용추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이 내용은 새로 증보(新增)하
△계곡을 타고 오르다.지난 2월 28일 친구와 함께 내연산 계곡을 찾았다. 지금까지 다녀본 중에 이번 겨울이 가장 계곡 물이 적었다. 양쪽 산비탈의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고, 엄청난 크기의 바위가 우리를 압도했다. 이따금 만나는 맑게 고인 물은 그야말로 보배로운 거울과 같은 보경(寶鏡) 그대로였다.보이는 경치마다 감격하여 감탄사를 연발하며 사진 찍기에 바빴다. 나타나는 계곡의 여울과 크고 작은 폭포를 헤아리며 알려진 이름이 없으면 생각나는 대로 이름을 지어 불렀다. 계곡 양편에 펼쳐진 경치는 또 어떤가. 겨울이라 활엽수의 나뭇잎이
경북일보가 ‘금석문(金石文)’을 연재한다. 금석문은 말 그대로 금문(金文)과 석문(石文)으로 나눈다. 금문은 금속제의 용기·악기·무기·화폐·인장·범종 등에 새겨진 문자다. 석문은 석제의 비(碑)·묘지(墓誌)·바위 등에 새겨진 문자이다. 금석문은 정확한 문헌이 적은 고대사의 해명에 기여하고 때로는 문헌상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기도 한다. 경북일보가 ‘금석문’을 연재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 지금 남아 있는 지역의 금석문을 체계적으로 탐구하고 정리하는 것 자체로도 뜻깊지만 역사 속의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