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나의 아들, 나의 어머니’의 배경 충효당 안동시 풍산읍 하리리 산 중턱에는 예안 이씨 충효당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집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순국했던 풍은 이홍인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고 있다. 건물 자체가 보물(553호)로 지정돼 있는 이 집은 일반에게는‘예안 이씨 충효당 종가’로 잘 알려져 있다. 충효당은 임진왜란 때 순국한 충신 이홍인 (1525~1594)과 그 9대손 이한오 (1719~1793)의 효행을 기려 이름이 붙여졌다. 한 가문에 임금이 두 개의 정려(旌閭)를 내리고 포상을 하는 충효의 가문은 ...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선산김씨 용암 종택(경상북도 민속자료 제61호)은 조선 시대 용암 김익중(金益重 : 1678~1740 )이 1728년에 지은 살림집이다. 김익중의 본관은 선산(善山)이고 자는 상삼(尙三)이며 호는 용암(龍菴)으로 아버지는 참판으로 증직된 김천길(金天吉)이다. 1721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 겸 선전관 을 지내고 미조항과 우수영의 진관(鎭官)을 역임했다. 1728년(영조 4년) 이인좌의 난(1728년 무신년에 일어난 반란이라고 무신란 이라고도 함)을 진압 하는 데 참여한 공으로 양무원종공신록(楊武原從功臣...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청음(淸陰) 김상헌(1570~1652)은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한 대표적 절개의 인물이다. 그는 청나라와 항복의 화의가 성립되자, 임금 앞에서 항복의 국서를 찢어버리고 자결하려 했으나 뜻을 못 이루고 고향인 안동 풍산읍 소산리 ‘청원루’에 내려와 은거했다. 이 시조는 이 사건으로 청나라로 압송돼 가던 중, 서울을 지나면서 읊은 우국충절의 시조다. 김상헌은 안동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이황의 문인이었던 윤근수에게 수학했다. 타...
△안동 선비정신 대표하는 ‘가일 마을’ 가일마을은 고려를 개국할 당시 공을 세운 안동 권태사의 후예들 가운데 복야공파 권항이 입향한 이래 지금까지 600여 년 동안 삶의 자취가 담겨진 안동 권씨 집성마을이다. 하회마을에서 직선거리로 4~5km, 마을 뒤편에는 검무산이 우뚝 서 있고 경북도청 신청사도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의를 위해서는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고 절의가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유가(儒家)에는 3년마다 금부도사가 드나들어야 하고, 갯밭에는 3년마다 강물이 드나들어야 한다”는 말이 전해 내려...
△ 3명의 정승 태어 날 형세 ‘사촌마을’ 의성군 점곡면 사촌마을은 안동 김씨, 풍산 류씨들이 세거하는 유서 깊은 선비 마을이다. 조선 중기의 명재상 서애 류성룡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점곡면은 사과로 유명하다. 사촌(沙村)인 까닭은 모래가 많기 때문이다. 이 마을에 사과나무가 많은 것은 사촌은 모래밭에 사는 과일을 의미하는 사과(沙果)와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600여년 내력을 지닌 마을에는 아름다운 숲과 30채에 이르는 옛 한옥들이 즐비하다. 마을 서쪽에는 천연기념물(405호)로 지정된 ‘사촌리 가로숲’이 마을의 역사와 ...
산운마을은 의성군 금성면 수정리 금성산 아래에 위치한 450년 전통을 간직한 영천이씨 집성촌이다. 점곡면의 안동김씨 ‘사촌마을’과 더불어 의성의 대표적인 반촌마을로 꼽힌다. 이 마을 뒤편의 금성산을 싸고 감도는 구름의 모양이 신비해 ‘산운’이라 이름 붙여졌다. 산운마을은 용의 기운이 서여 있는 듯하고 닭이 알을 품고 있는 듯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이 마을은 과거 급제자와 인재가 많이 배출돼 ‘양반마을’ 또는 ‘대감마을’로 불려진다. 마을 곳곳엔 벼슬에 급제하면 심었다는 회나무가 집집마다 우거져 있다. 오늘날 영천(산운)이씨 ...
대산 이상정(1711-1781)은 한평생 오직 학문으로 나아간 인물이다. 흔히 대산 이상정을 퇴계 학맥을 이은 대학자라고 부른다. 그의 별칭이 ‘소퇴계’인 것을 보면 일찍이 그의 학문은 근동으로부터 시작하여 중앙에까지 두루 미치고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퇴계 학맥의 연원과 정맥을 이어받아 꽃피운 것에 비해 인식은 상당히 저평가되어 있다는 것에 아쉬움을 남긴다. 영남학맥에서 대산만큼 학문이 깊은 사람도 드물었다. 그의 제자 인명록인 ‘고산급문록’에 올려 있는 문하생만 273명에 이른다. 안동 일직 망호리 출신의 이상정은 ...
김천시 구성면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연안 이 씨는 정양공 이숙기를 현조로 하는 정양공파와 충간공 이숭원을 현조로 하는 충간공파로 갈라진다. 원래 연안 이 씨는 지금의 서울시 중구 필동 일대를 기반으로 세거해왔으나, 1400년 무렵 연성부원군 이말정이 김천시 구성면 지품 마을에 터를 잡으면서 김천지역에 세거하기 시작했다. 이후 홍수로 인해 감천이 범람하자 거창의 못질로 옮겨갔다가 다시 지품 마을로 돌아왔다. 이말정의 후손들은 지품 마을의 인근으로 점차 확산해 갔는데, 특히 황계천을 사이에 둔 상원리와 상좌원리에 밀집해 있다. 그...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여러 성씨와 문중이 함께 마을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마을 중앙에 자리 잡은 오봉 종택(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238호)은 정면의 삼문 대문채를 지나 오봉헌(五峯軒)과 사당을 잇는 중심축에서 우측으로 자리하고, 좌측에는 벽산정(碧山亭)이 배치돼 있다. 안동권씨 부정공파 입향조인 권책(權策 1444~ )이 거주하던 종택으로 지었는지 200여 년이 지난 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재건해 건물과 주변 환경을 잘 정돈했다 건물들은 남향으로 지어져 있다. 솟을삼문과 오봉헌(五峯軒), 사당(祠堂)을 잇는 중심축에서...
△안동 내앞마을 의성김씨 대종가 대종가로 불리는 의성김씨 종택은 안동 시내에서 동쪽으로 반변천을 따라 12Km를 올라가다 보면 34번국도 좌측에 고풍어린 기와집들이 즐비하게 자리 잡고 있다. 바로 5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의성김씨 집성촌이다. 종택이 위치한 천전리는 반변천의 앞에 있다고 해서 ‘내앞’으로 불린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내앞 마을은 의성김씨 청계파의 동성마을로 유명한 반촌마을이다. 이 마을 가운데에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을 중시조로 모시는 의성김씨 내앞 종택(청계종택)이 위치한다. 이 종택은...
임진왜란에 구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참모이자 천문지리에 능한 풍수가였던 두사충(杜師忠)이 성주 지역을 둘러보고 다섯 곳을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지목한 바 있다. 이 다섯 곳은 수륜면 윤동마을과 초전면 월곡리 홈실, 대가면 칠봉리 사도실, 선남면 오도리 오도마을, 칠곡군 지천면 창평리 웃갓(이곳은 인조 이전까지 성주목의 속현인 팔거현이었다) 등인데, 두사충이 첫 번째로 꼽은 명당인 수륜면 윤동마을에 의성김씨 문절공파(文節公派)의 종가인 사우당 종택이 자리하고 있다. 종택은 평지에서 마을 뒷산 아래까지 여러 채의 건물이...
영덕에서 7번국도 울진방향으로 약10분쯤 가면 영해 송천교차로서 내려 영해 영양 간 918번 지방도로의 출렁이는 황금들녘을 약5분정도 가면 도로변 좌측에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 제271호 영덕 영양남씨 난고종택 있다. 난고(蘭皐)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을 지낸 성균관 진사 남경훈(南慶勳, 1572~1612)의 호이다. 이 집은 난고의 아들 안분당(安分堂) 남길(南吉, 1595~1564)이 1624년(인조2년) 아버지를 추모하면서 건립했다 난고종택은 조선시대 상류층인 사대부들의 생활상과 건축에 대한 의식이 잘 보존, 전승돼 있으며...
중요민속자료 제105호로 지정된 ‘해평 최상학 가옥’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큰 바위 두 개가 집 앞에 있어 쌍암고가로도 불리고 있는데 현재는 최렬(82)씨가 지키고 있다. 집은 400여 년 전 이 고을로 들어와 정착한 입향조 검재 최수지(儉齋 崔水智)의 10대손 진사 최광익이 아들의 살림집으로 조선 정조 3년(1779)에 지었다. 본래는 사당채·안채·안대문채·사랑채·대문채와 그 밖의 부속건물로 구성된 조선 후기 지방 상류가옥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일부를 잃고 안채·안대문채·사랑채와 사당채만 남았다. 사랑채는 안 대문채 밖에 정...
2016년 4월 27일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 제286호로 지정된 무안박씨 무의공파 종택은 축산면 도곡1리 (속칭:번안계 )의 북쪽에 있다. 야산을 배산으로 안들을 내려다 보며 남향으로 배치 돼있는 조선시대 명문 양반가의 저택이다. 무의공 종택은 1644년 무의공 박의장(1555~1615)의 넷째아들 박선(1596~1669)이 맏형 박유를 위해 건립했다. 건물은 6칸 규모로 솟을대문과 사랑마당을 사이에 두고 입구자(口)자형의 정침이 배치돼 있고 정침 우측 후면에는 무의공 불천위 사당이 있다. 정침 오른쪽 전면에 사랑채가 자리를...
갈암종택은 조선 후기 문인이며 성리학자인 갈암 이현일 (1627~1704) 선생의 종가다. 1910년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에 건축했던 것인데, 임하댐 건설로 인해 1992년에 이곳으로 이건 했다. 종택 바로 앞에는 수만 평의 넓은 들이 펼쳐져 있고 그 사이로 송천이 유유히 흐른다. 종택은 원래 정침만 있었으나, 이건(移建)하면서 전면에 5칸 규모의 솟을대문을 세우고 오른쪽 뒤로는 사당을 복원해 종택으로서 면모를 갖추게 됐다. 정침은 정면 6칸, 측면 4칸 반의 ‘ㅁ’자형 건물이며, 전면의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의 양측 칸에는...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 있는 간재(簡齋) 변중일(1575~1660) 종택. 금계리는 금제, 검제라는 별칭과 더불어 영원히 재앙이 없는 천년불패의 땅으로 불려왔던 곳. 안동 3대 토성인 안동김씨, 권씨, 장씨의 시조묘가 들어선 이곳에 원주변씨 간재종택도 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봉정사로 가는 도로 옆에 원주변씨 간재종택과 충효문이라는 표지석이 서 있었고 소로길을 따라 들어가면 홍살문이 서 있고 입구에는 연못과 ‘금학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종택 앞 담장을 뚫고 서 있는 향나무 고목은 오랜 세월 이 집안과 함께 하고 있었다.안동지역 원주
△충효(忠孝)의 덕목을 이어온 소재 종가(蘇齋宗家) 타지에서의 긴 유배생활에서도 유자의 덕목인 효를 실천했던 소재 노수신 선생의 종가는 상주시 화서면 사산리에 자리 잡고 있다. 화서면은 신라 경덕왕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화령’으로 불리던 유서 깊은 고장인데 상주와 광산 노씨의 각별한 인연은 상촌 노숭 선생이 상산 김씨의 딸과 혼인을 맺으면서 시작됐다. 이후 소재 선생의 7대조인 ‘노상인’이 화령으로 들어와 터를 잡았고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화령에서 소재 선생을 비롯한 광주 노씨 경평공파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고 있다. △긴 유...
경주손씨와 여강이씨 두 가문이 500여 년 동안 한 마을에 함께 거주하며 공존하고 있는 경주 양동마을. 경주시내에서 형산강을 따라 포항 방면으로 20km 쯤 가다보면 기와집과 초가집이 한 폭의그림처럼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의 양동마을이 나온다.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우리나라 대표적인 양반집성촌인 양동마을은 지난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후 국내외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유명 관광지가 됐다. 소박하지만 기품이 담긴 건축물이 있고, 걸출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유서 깊은 양동마을. 이 마을 중앙부에 해당하는 ...
경북 고령군 쌍림면 합가1리의 개실마을은 현재 62가구 158명이 정답게 살고 있는 전형적인 민속마을이다. 조선시대 중엽 영남사림학파의 종조인 점필재(점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 선생의 후손 일선김씨 집성촌으로 350여년간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이 곳에는 민속자료 제62호 점필재 종택, 문화재자료 제111호 도연재, 유형문화재, 점필재의 문화유품 등의 문화재가 있다. 조선 중엽 무오사화 때 화를 입은 영남사림학파의 종조 점필재 김종직 후손의 세거지로써 본래 고령군 하동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
△소통과 화합을 실천해 온 상주의 대표 명문가 우복종가(愚伏宗家) 17세기 영남학파 전통을 잇는 학자이자 관료인 우복 정경세(鄭經世 1563~1633), 불통의 시대를 사는 지금 학문과 경계를 넘나들던 정경세의 소통과 화합의 리더십이 새삼 주목되는 이유다. 시내에서 차를 타고 외서면 우산리 우복종가를 찾아가면 산천과 어우러진 독가촌 우복종가를 만나는데 정경세는 임진왜란 이후 관직을 버리고 외서면 우산리에 조그만 정자와 살림집을 지었다. 영조 26년,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해 영조가 사폐지로 하사한 ‘남북 10리와 동서 5리’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