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회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갈등이 불가피하다. 세대 간의 갈등이 그렇고 지역끼리의 마찰은 심리적으로 적대감이 표출된다. 갈등의 대표적인 예를 꼽으라면 백인의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에서 오는 갈등이 아닐까 싶다.1992년도 4월에 LA에서 일어났던 흑인 폭동은 한인들이 애꿎게 갈등의 격랑에 휘말리게 된 사건이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두순자 사건이 먼저 폭동의 불씨를 품게 되었다. 한 흑인 소녀가 가게에 들어와 돈도 내지 않고 음료수를 가방에 넣는 것을 목격했고 주인이 이를 말리자 흑인은 맨주먹으로 한인의 얼굴을 가격했다. 1
타국에 뿌리를 내민다는 의미는 눈치 빠르게 생존의 방식을 터득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지 않으면 밥 한 그릇 얻어먹는 것도 쉽지 않다.LA에 도착한 남편은 미리 연락해둔 친척과 공항에서 만났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 친척은 자기 집에서 하룻밤도 지낼 수 없다고 거절했던 모양이다. 난감해진 남편은 한인 마켓까지만 데려다 달라고 통사정했다. 한인 마켓이나 식당에 가면 각종 구인·구직 광고가 붙어있다는 것을 이미 호주살이 경험으로 알고 있는 남편이다. 마켓 벽보에 붙은 ‘하숙생 구함’ 전단지에 적힌 전화번호로 도착한 곳에 남편을
미국에 산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축복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전쟁 도발의 낌새가 보이거나 사회가 불안해지면 태평양 너머에 있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쯤 가졌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타민족들이 목숨을 걸고 미국 국경을 넘는 걸 보면 미국에 사는 건 죽지 않고 천국을 경험하는 일이라고 표현하고 싶다.특히 교육을 생각한다면 미국이 단연 으뜸이다. 미국에서 갖는 학위는 ‘성공’이라는 아이콘을 충족시켜준다. 그렇다고 김 여사의 아메리칸드림을 누구나 이루는 것도 아니다. 남편 없이 남매를 키웠던 김 여사에게 재봉틀은
타국에 살면 한국 사람이라는 인식이 두꺼운 질감으로 도드라진다. 태극기를 보면 가슴이 뭉클해지고 자긍심이 출렁대는 감동은 감출 길이 없다. 5천 년 역사를 지닌 민족의 후손이라는 타이틀은 당당함을 넘어 우월감마저 안겨주어서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이민자에게 불굴의 용기와 힘이 솟아나게 만든다. 그래서 더욱 대접받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나도 한국인의 후손이라고.한국에서도, 미국 LA에서도 논란이 된 장성순이라는 인물이 있다. 밀정을 처단하던 장성순이 일본 경찰에 쫓기다 일본군 19사단에 귀순해서 귀순증을 받은 사실을 기록한 동아일보
‘인생은 줄서기’라는 말은 살다 보면 볼드체로 짙어진다. 호랑이에게 쫓기던 남매에게 하늘에서 내려진 동아줄은 전래동화에서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도 하늘에서 내리는 동아줄을 잡는 일이 생겨날 때도 있다.이민변호사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실력 있는 변호사를 만난다는 건 쉽지 않다. 어떤 분야든 전문가라고 다 전문가가 아니다. 이민 신청을 도와준다는 이민변호사들의 화려한 광고 문구는 그럴듯해도 동식이네처럼 서류 신청이 제대로 들어가지 못하면 진퇴양난이 되고 만다. 기회는 한 번뿐인데 그 변호사의 능력이 얼마나 출중한지 테스트를
영주권을 해결하지 못한 채 꾸역꾸역 10년이란 시간이 흘러갔다. 처음엔 나는 기고만장했었다. 남편보다 먼저 취업 이민 스폰서를 찾을 줄 알았다. 하지만 옮겨가는 회사마다 오래 버티질 못했다. 인종이나 나이를 대놓고 문제 삼으면 위배 된다고 노동법에 규정하고 있지만 실상은 차별하거나 불이익을 받았다. 나이를 따지지 않는 회사에 들어가면 주먹구구식이라 내가 만족하지 못했고 체계가 잡혀있는 회사에서는 나는 겉돌았다. 이력서에 나열된 이직 기록은 신뢰성을 갈아먹는 약점이 되고 말았다.내가 취업 이민 스폰서를 찾아 헤매는 동안 남편이 침술
실크 프린팅 공장에 다닐 때 알게 된 젊은이가 있다. 이름은 모른다. 그가 MIT공대를 나왔다는 것밖에는. 그가 가끔 크리스를 찾아왔다. 크리스를 안다는 건 제임스와도 친하다는 뜻이다. 차분하고 내성적으로 보이는 그가 두 형제와 어울려 다니는 게 양말에 짚신 신 듯 낯설게 느껴졌다. 인연을 맺고 끝내는 일에 정답은 없으니 두 형제와 통하는 공감대가 있었으리라.그건 도박이었다. 그는 금요일이면 나타나 귀퉁이가 찢겨나간 낡은 소파에 앉아 공장문 닫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또 한 남자, 핸드폰을 5개씩 들고 다니는 남자도 합세했다. 그 남
두 형제가 운영했던 프린팅 공장은 소토(Soto)에 있었다. 원단 세일을 했던 동생 제임스는 봉제공장을 오고 가며 물건들을 실어 날랐다. 색깔 감각이 있는 형 크리스는 멕시칸들과 손짓으로 소통하며 티셔츠에 염료를 찍어냈다. 공업고등학교를 나와서 그런지 기계를 다루는 솜씨도 능숙했다. 곱상한 외모를 지닌 제임스가 자바시장과 원단회사를 들락거리며 일감을 물어오고 손재주가 많은 크리스가 멕시칸 노동자와 잘 어울리니 딴 맘 먹지 않고 성실하게 몸을 놀리면 금방 사업체를 일으킬 것처럼 보였다.건물을 들락거리는 쥐들의 흔적이 놓인 사무실에 들
간판회사를 걷어찬 나는 휘청거렸다. 취업 이민 신청은 이미 물 건너갔고 별 따는 것보다 어렵다는 취업 이민 스폰서를 다시 구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하루하루가 부담이었다. 간판회사를 거쳐 여러 회사를 찾아다니며 면접을 보았다. 지금은 어렵더라도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믿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다. 절망 가운데서 희망을 꿈꾸라니. 뻔히 보이는 현실을 보면서도 상상으로 다른 별천지를 상상한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백 양의 꼬드김에 속아 영주권도 날아간 모든 게 내 실수라고 생각하니 자책이 엿물처럼 들러붙어 머릿속에서 떠나
백 양이 그만두고 나이가 지긋한 중년 여인이 간판회사에 새로 들어왔다. 히스패닉 세일즈맨 루이스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영어를 할 사람이 필요했던 K사장은 개인적으로 알고 지냈던 수잔 언니를 채용했다. 한때 개인사업체까지 운영했던 그녀는 영어를 유창하게 했다. 능력이 많은 그녀가 번듯한 집과 사업체를 접어야 했던 이유는 중풍을 맞게 된 남편의 병원비 때문이었다. 보험이 없으면 미국에서의 병원비는 엄청나다. 몇십만 달러 넘는 병원비를 충당하느라 집까지 처분했던 수잔 언니는 세금 문제로 현금을 받는 조건으로 간판회사에 들어왔다.루이스는
“미친놈이여.”K사장과 고등학교 동창인 미스터 임이 투덜거렸다. 실은 그도 나처럼 간판회사로 취업이민 진행 중이었다. 우리 둘은 영주권 나올 때까지 최저임금으로 고용된 현대판 노예 신세다. 주문 없는 공장이지만 사장 입장에서는 마냥 일손을 놀릴 수 없는 일 아닌가. 무슨 일이라도 미스터 임에게 시켜야 했다. 미스터 임이 하는 일은 주차장 한쪽에 세워진 스티로폼을 다른 쪽으로 옮기는 게 고작이다. 스티로폼은 5년 동안 사용하고도 남을 만큼 쌓여있다. 다음 날이 되면 미스터 임은 옮긴 스티로폼을 다시 원래 자리로 옮겨 놓는다. 미스터
이민 상담을 위해 이민변호사 사무실을 방문했다. 스폰서를 구했다고 취업 이민이 원만하게 이뤄지는 게 아니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스폰서의 재정이 충분하지 않은 경우도 많고 신청자의 자격조건이 그 회사랑 맞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간판회사와 그래픽 디자이너라는 직종은 이민 신청 자격조건에 부합했다. 반신반의했지만 회사 오너의 재정 상태도 충분하다는 변호사의 말에 나는 안도했다.하지만 막상 취업이민을 진행하려고 보니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그 당시만 해도 변호사 비용이 1만 달러였다. 착수금으로 먼저 내고 영주권이
슬라우슨 거리로 진입하는 도시의 풍광은 사뭇 달랐다. 흙먼지가 날리는 광야에서 말 타고 가는 서부 시대 총잡이들의 활극을 영화로만 접했던 내가 막상 그 황량한 거리에 진입하자 덜컥 겁이 났다. 면접을 보기 위해 나는 미국이라고 할 수 없는 건물들과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핸들 잡은 손바닥이 땀으로 끈적해졌다.구직광고를 보고 인터뷰를 가는 내내 ‘그냥 돌아갈까?’를 수도 없이 떠올렸다. 면접을 보러오라는 전화기 너머로 들리던 탁한 음성도 왠지 믿음이 가지 않지만 망설이는 동안 어영부영 자동차는 목적
정법과 위법 사이의 거리는 아주 멀다. 그래서 편법은 지능적으로 진화되고 교묘하게 법을 조롱한다. 불법인 줄 알면서도 을이 되는 이가 있고 을의 약점을 이용한 갑의 착취는 어느 사회나 있기 마련이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미국이란 사회는 불법에 대한 적발은 부지불식간에 이뤄지고 그 징계 또한 상상을 초월해서 세금 포탈이나 노동법 등으로 걸리게 되면 사업체를 접어야 할 만큼 감시는 철저하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불법’이라는 멍에를 목에 걸기 전까지의 일이다. 걸리기 전까지는 모든 위법은 당당하다.미국에 적합한 신분으로
미국연방 정부 인구센서스국의 통계에 따르면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의 수가 2020년 기준으로 199만 명이고 한인 10명 중 3명이 캘리포니아에 산다고 한다.우리도 로스앤젤레스에 둥지를 틀었다. 남편이 다니는 학교가 있는 곳이라 다른 곳은 갈 수도 없었고 한 번 자리를 잡으니 타주로 이사를 가는 건 쉽지 않았다. 로스앤젤레스는 ‘한국의 지방도시’라는 농담이 나올 만큼 한인들이 많이 산다. 잘못 걸려온 전화를 받으면 영어가 아닌 “여보세요”라는 음성이 들릴 정도다. 한인들이 많이 산다는 것은 영어가 늘지 않는 이유가 되지만 영어를 몰라
호주 생활 8년 동안 인생의 쓴맛을 보았으나 한국살이는 아득했다. 나는 마치지 못했던 대학 졸업증이 마음에 걸렸고 남편의 일자리도 신통치 않았다. 앞으로 재고 뒤로 재도 도저히 한국에서는 두 딸을 대학을 마치도록 뒷받침을 해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설사 남편이 제빵 기술자격증을 딴다거나 일식 요리사 자격증을 딴다 한들 당장의 입에 풀칠하는 것도 어려웠다.나는 간신히 친정과 시댁을 설득해서 중간에 포기했던 대학을 다시 다니게 되었다. 워낙 오랫동안 휴학을 했던 터라 입학금을 다시 내고 수강신청을 해야 했다. 사람들은 다들 뜨악하게
각 나라마다 바닷가 근처에는 놀이동산이 있기 마련이다. 바다를 낀 유원지에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워낙 이동인구가 많다 보니 물만 팔아도 수입이 꽤 짭짤하다. 인천 월미도에 있는 유원지처럼 시드니에도 루나 파크(Luna Park)가 있었다.그곳에서 아이스크림 가게를 하던 K씨 부부를 알게 되었다. 그 부부는 장사하곤 어울리지 않는 풍모를 지녔다. 장사하는 사람이라고 얼굴에 써 붙인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외모에서 직업적인 분위기를 풍기기 마련이다. 그 부부의 점잖은 말투와 온화한 인상은 강렬한 태
이민을 떠나려면 무엇보다 자신만의 필살기가 있어야 한다. 돈이 많던 가, 아니면 반드시 기술이라도 있어야 한다. 미용이나 요리 따위의 기술은 비단 이민을 떠나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호주에서 그걸 뼈저리게 느낀 남편은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케이크 만드는 기술을 배우겠다며 빵집을 기웃거렸다. 기술을 알려준다는 조건으로 겨우 고속터미널 근처에 있는 빵가게 조수 자리를 구하게 되었는데 어이없게도 한 달도 못 돼 그 가게가 문을 닫고 말았다. 감자 샐러드 만들 때 껍질을 벗기지 않고 통째로 물에 넣고 삶는 요령을 끝으로 제
세월만 축낸 자식을 꾸짖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손녀딸을 반기는 시부모님의 모습은 차라리 배려였다. 호주생활의 불성실에 대해 때 늦는 후회가 밀려왔다. 쌀을 씻다가도, 지하철을 타다가도 ‘8년 동안 호주에서 뭐 하다 왔니?’ 하는 소리가 가슴에서 후려친다. 8년간의 호주 유학생활은 귀퉁이가 살짝 시든 깻잎처럼 버리기는 아깝고 간직하기엔 고통스러운 흔적들이었다. 그러던 중에 현지 지인들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일전에 이미 밝혔지만 이민생활에서의 종교는 지역공동체 역할을 했기에 우리도 한인교회에 몸담고 있었다. 그 교인 중의 절
위장결혼이나 원정출산 따위는 합법적인 체류신분을 얻기 위한 대표적인 편법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영주권을 얻으려는 자와 그 약점을 이용해 임금착취를 하는 업주의 불법적인 행태는 이민사회에 이따금 회자되는 풍속도이다. 이민성 직원은 위장결혼을 적발하기 위해 직접 살고 있는 집을 방문하기도 하고 남자와 여자를 따로 불러내어 아침에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물어보며 실제로 부부관계인지 확인한다.위장결혼을 소개하는 이민변호사의 조언은 뱀이 건넨 사과를 들고 고민하는 하와처럼 유혹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억지로 꿰어맞추자면 이민 신청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