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나무에서 종이 한 장이 나오기까지 전 과정을 잘 알고 익힌 사람을 ‘한지장’(韓紙匠)이라고 한다.닥섬유 재료만 보고도 묵은 닥인지 햇 닥인지, 어느 지방의 닥인지 닥원료의 상태를 파악해서 삶을 때, 잿물의 농도와 화력의 강도를 맞출 줄 알아야 하며, 지료의 상태를 파악해서 닥풀의 점도와 물질의 방법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하는 등 한지제조과정에서 장인의 감도(感度)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1991년, 가평 산유리 전통한지연구소 시절의 일이다. 서울에 있는 6개국의 외교관(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등) 가족들이 한지만들기 체험교
한지는 여느 공예와 달리 평면공예이고 가볍다.입체성과 무게가 있는 실용적인 물건에 예술적 가치를 더한 것을 공예품이라 하는데, 종이는 다른 공예품에 비해 예술성을 추구하는 상품이 아니기 때문에 공예품이라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기계로 일정하게 생산되는 공산품으로 치기에는 억울할 정도로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지녔다. 그것은 한지작업이 수작업이기 때문에 한 장 한 장 사람의 공력이 느껴지는 한지의 멋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공예품이 단일로서 완성되는 예술품인데 비해 종이는 그 자체로서 완성품이면서 동시에 그 종이에 글씨가 쓰여
닥종이가 좋았습니다. 함께 길을 걸었습니다.닥종이는 내 유년의 추억과 함께 언제나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윤기가 흐릅니다. 만지면 만질수록 손끝에 느껴지는 감촉은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부추기고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합니다. 텅 빈 한 장의 종이처럼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그렇게 너그럽고 자유롭게 가없는 세상에 회향합니다.-2009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초대전 ‘닥종이와 함께 純,巡,順’ 작가노트에서- △종이 만들기에서 작품이 되기까지내가 닥종이작업을 하다가 작가가 된 사연에는 세계적인 사진가이며 내셔날지오그래픽 편집장을 역임한 故에
1984년부터 나는 기존의 발과 발틀을 벗어나서 종이 작업을 자유롭게 하기 시작했다.망창을 이용해서 우둘 종이, 오목 종이, 물방울 종이, 물결 종이, 구멍 종이 등 다양한 종이를 만들었다. 이런 행위는 아마도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발상이라고 본다.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우리 집에 실성한 할아버지 한 분이 얹혀 지내게 됐다. 한의사인 아버지께서 침과 약으로 치료하자 안정을 찾은 할아버지는 양평 무내미(지금의 문호리)에서 종이 뜨던 통꾼(紙匠)이었다는 것이다.어느 해 큰 물난리가 나서 집과 처자식을 몽땅 잃
옛날 선비들은 말을 타고 길을 가다가 닥나무를 만나면 말에서 내려서 “아이고, 닥나무 선생님, 덕분에 공부 잘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라며 절을 하고 지나갔다고 한다. 그만큼 종이를 만드는 원료가 되는 닥나무는 귀한 대접을 받았다.사찰에서는 종이를 부처님의 법을 담는 곳간이라 하여 ‘법장(法藏)’이라고 불렀으며 법이 담긴 곳간인 종이를 함부로 다루지 않고 공경했다. 천수경에는 제일 먼저 입으로 지은 죄를 깨끗이 씻는 진언인 정구업진언으로써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를 하고 그 다음에 개법장진언으로 “옴 아라남 아라다”을
인류 문명사에서 종이의 발명은 인류의 정신문화를 발전시킨 대발명품으로, 종이문화가 발달한 민족일수록 우수한 문화민족이라 할 수 있다.우리나라는 언제부터 종이를 만들어 왔을까? ‘삼국사기’ 영양왕조(서기600년)에 의하면 ‘고구려 건국초기(기원전 37년)부터 시사(時事)를 기록한 유기(留記)라는 역사책 백권(百券)이 있었는데 태학박사 이문진으로 하여금 신집 오권(新集 五券)으로 개수편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한편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日本書記)’에는 서기 600년에 고구려의 담징스님이 종이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줬다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