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자질 뛰어나…국난 극복에 헌신한 조선의 문장가

명계서원 전경.

△임진왜란 막판에 터진 악재, 정응태무고사건

1598년 10월, 임진왜란이 끝나갈 즈음에 대형악재가 터졌다. 명나라 찬획주사 정응태가 3번째 상소를 명황제에게 올려 조선을 또 위기에 빠뜨렸다. 조선이 일본과 손을 잡고 고구려 고토인 요동을 되찾으려 하는데 이를 조선에 파병나간 양호가 도와주고 있다는 내용이다. 정응태의 상소는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조선에 태풍으로 몰아쳤다. 이 상소로 정응태의 정적인 양호와 마귀, 이여매, 형개 등이 탄핵당했다. 양호는 정묘재란 때 조선 참전 명나라 군사를 총지휘하는 사령관이었고 나머지도 전쟁에 참여했거나 양호와 같은 당파였다.

양호가 탄핵됨에 따라 조선 조정에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명나라가 조선을 적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일본과의 전쟁으로 나라가 만신창이가 된 판에 명나라에게 회초리를 맞아야 할 처지였다. 이때의 위기를 장유는 이렇게 말했다. “정응태가 우리를 명나라에 무고한 일은, 그 화난(禍難)의 기틀이 사납기를 임진왜란보다 더 심했다.” 장유의 ‘백사선생집서문’. 정응태가 상소를 올릴 때마다 해명을 하기 위해 두 차례나 사행단을 꾸렸던 조선은 세 번째 변무사행단을 꾸려야 했다. 정사에 우의정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 부사에 월사(月沙)이정구(李廷龜, 1564~1635), 서장관은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 1556~1622)이 맡았다. 사행단은 오직 글과 말을 무기로 명나라 황제의 오해를 풀고 정응태의 무고를 입증해야 했으므로 ‘목릉성세’로 불리던 당시에도 당대 최고의 문장가들로 조직했다.

목숨을 건 사행(使行)이었다. 조선의 왕이 명나라 황제께 ‘석고대명(席藁待命)’한다는 내용의 굴욕적인 주문(奏文)을 들고 가는 사행길이다. ‘거적을 깔고 엎드려 처분을 기다리며 용서를 빌어야 할’ 정도로 사안이 그만큼 급박하고 엄중하고 중차대했다. 황여일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목숨을 내놓을 수밖에 없겠다고 이를 물었다. 절박했고 비장했다.

황여일의 자는 회원(會元) 호는 해월(海月), 하담(霞潭), 매월(梅月), 만귀(晩歸) 등이다. 울진 평해의 해월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평해. 아버지는 창주(滄州) 황응징(黃應澄) 어머니는 야성정씨다. 8세 때부터 숙부인 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에게서 수학했다. 그 시기에 죽으로 끼니를 이을 정도로 집안이 가난하였지만 10리 정도 되는 거리를 오가며 배웠다. 황응청은 어린 조카가 이해력이 뛰어난데다 암기력마저 뛰어나 황씨 가문을 크게 일으킨 인물이라며 자랑했다고 한다. 이때 귀봉(龜峯) 김수일(金守一)이 평해군수로 있던 형 약봉(藥峯) 김극일(金克一)을 만나러 왔다가 황여일을 보고 마음에 들어 했다. 김수일은 뒤에 사위를 삼았다. 13세에 경서와 ‘사기(史記)’를 독파했으며 14세에 간성향시에 응시해 장원급제했다. 21세에 진사복시에 급제하고 성균관에 입학했다. 30세에 별시문과 을과에 응시해 장원급제한 뒤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기사관 승문원 부정 등을 거쳐 왕립도서관 격인 호당(湖堂)에서 근무했다. 이때 임금의 아침 강론과 저녁 강론에 참여했다. 젊은 나이에 임금과 대신 앞에서 강론한 경우는 드물지만, 임금은 그의 빼어난 학식과 문장을 신뢰했다.

임금이 신뢰한 그 문장이 그를 변무사행단 서장관으로 명나라로 가게 만들었다. 사행단은 북풍한설 혹한의 추위를 뚫고 나갔다. 해가 바뀌어 1599년 1월 23일에 북경에 도착해 황제와 신하들에게 올릴 주문과 정문을 만들었다. 하룻밤 사이에 40부를 필사한 뒤 관리들이 모여있는 회의장 밖 계단 아래 꿇어앉아서 기다렸다가 만났다. 관계 요로를 다 찾아다니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황제에게 이 같은 사실일 진달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는 동안 예부에서 사행단의 노고를 위로하는 잔치가 열기로 했으나 왕이 식음을 전폐하고 있는데 신하가 잔치를 즐길 수는 없다는 논리로 정중히 사양했다.

24일에 마침내 황제가 정응태의 상소를 무고로 판단하고 정응태를 파직시켰다. 조선에 칙서를 내려 위유(慰諭)하라고 자문했다. 1598년 10월 21일에 서울을 출발했던 사행단은 다음해 4월 25일 약 200여 일이 걸리는 여정을 마치고 큰 성과를 거두고 한양으로 돌아왔다. 이항복은 황여일의 문장이 큰일을 해냈다고 칭찬했다.
 

해월헌 옆의 모고헌.

△권율과 이순신 사이의 소통창구로 공을 세우다

황여일은 뛰어난 문장으로 당대 문인과 정치인들의 인정을 받았지만, 전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아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 2년 전 왕이 정언신과 이일, 신립 등 명장들을 불러 일본의 침략 등에 대비한 국방회의를 열었는데 황여일도 참석했다. 임진왜란이 터지기 며칠 전 그는 함경도 고산찰방으로 제수됐다가 왕자인 임해군과 순화군을 호종해 온 윤탁연의 종사관이 됐다. 이때 회령아전으로 있던 국경인이 난민들을 규합해 임해군과 순화군을 잡아 왜장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기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황여일도 포로가 됐다가 두 왕자와 함께 석방됐다. 10월에 삼수사 윤경로와 함께 함흥에서 왜군을 맞아 3일 동안 밤낮없이 싸워 적을 50리 밖으로 몰아내며 승리를 거뒀다. 그 공으로 형조정랑에 특진됐다. 명나라의 명장 이영춘에게 화전법(火戰法)을 배워 영의정 류성룡에게 보고해 전 병력에게 보급토록 했다.

39세에 도원수 권율의 종사관으로 발탁됐다. 황여일은 이때 권율부대에서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을 만난다. 이순신은 초계에 집을 얻어놓고 권율에게 군사 자문관 역할을 하고 있었다. 황여일과 이순신의 첫 만남은 1597년 6월 10일이다. 이순신은 첫 만남부터 황여일과 뜻이 맞아 밤늦도록 이야기했다. 황여일에게 이런저런 조언도 하며 권율과의 소통 창구로 활용했다.

6월초 10일 맑음. 저녁에 원수 종사관 황여일이 방문해서 조용히 이야기하다가 임진년에 왜적을 무찌른 일에 대해 크게 칭찬해 마지않았다. 또 산성에 험고한 요새를 쌓지 않은 일과 당면한 토벌 방비의 대책이 허술한 것 등을 말했다. 밤이 깊은 줄을 깨닫지 못하고 돌아갈 것을 잊고 이야기했다.

당시 삼군수군통제사는 이순신의 뒤를 이어 원균이 맡고 있었는데 권율은 원균을 신뢰하지 않았다. 따라서 권율은 이순신으로부터 수군에 대한 군사전략을 조언받곤 했는데 황여일이 이순신과 권율사이를 오가며 가교역할을 담당했다.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에는 1597년 6월 7일부터 7월26일까지 2개 월도 안되는 기간 동안 무려 23차례나 황여일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다. 기록하지 않은 날이 있다고 가정할 때 거의 매일 어떤 식으로든 소통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과 황여일이 나눈 대화는 곧바로 권율에게 보고되고 작전에 활용됐다.

7월 15일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왜군에게 처참하게 무너지고 자신은 전사했다. 난중일기에서 황여일을 언급한 기록은 7월 26일자로 끝났다. 그즈음 이순신은 패전 상황을 파악하라는 권율의 명령을 받고 노량 등 남해 연안을 돌아보던 중이었다가 8월 3일에 진주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임명교지를 받고 복귀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이순신이 11월 19일 노량대첩에서 전사함으로써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됐다.

전쟁이 끝나고 46세가 되는 1601년 황여일은 예천군수를 제수받았다. 예천에는 좌의정을 지낸 약포(藥圃) 정탁(鄭琢)을 43년간의 관료생활을 접고 고향에서 만년의 청복을 누리고 있었다. 정탁과의 이런 인연으로 뒤에 부인이 죽자 정탁의 외손녀 이씨부인과 결혼을 하게 된다.

51세에 영천군수를 제수받고 이듬해 정몽주의 문집을 교정했다. 정몽주의 효자비각을 중수하고 기문을 지어 개판했다. 57세에 창원부사에 부임했다. 이해에 아들 동명이 별시에 급제했다. 63세에 동래부사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와 해월헌의 당호를 만귀헌(晩歸軒)으로 고치고 유유자적했다.

1623년에 아들 동명이 북쪽 오랑캐에 대한 대책을 올렸다가 ‘오랑캐와 화친을 주장한다’며 무고를 당해 유배를 떠났다. 아들이 유배를 떠난 뒤 두 달 지나 정침에서 세상을 떠났다. 가선대부 이조 참판에 추증됐고 동지경연의금부춘추관 성균관사 홍문대제학 예문관제학 세자좌부빈객이 됐다.
 

울진군 기성면 정명리에 있는 명계서원. 황여일과 황응청의 덕행기리기 위해 창건됐다.

△황여일의 유적지

울진군 기성면에 있는 해월종택은 야산을 등지고 정자 사당 정침이 남향으로 배치돼 있다. 해월 황여일이 1588년 4월에 세웠다. 영의정을 지내다 귀양와 있던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와 처외조부인 정탁이 이곳을 찾아 와 시를 지었다. 정탁은 ‘해월’에 대해 ‘주인이 해월로 집의 편약을 한 것이 어찌 의미가 없겠는가. 주인의 국량은 바다와 같이 넓고 마음은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을 헤아릴 수 있다. 이 집에서 사물을 관조하다 보면 진덕수업(進德修業)의 밑천이 되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기문은 이산해가 썼다.
 

울진군 기성면에 있는 황여일의 생가인 해월종택. 이집은 황여일의 외삼촌인 웅치전투의 영웅 김제군수 정담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명계서원은 울진군 기성군 정명리에 있다. 척산천이 내려 보이는 야산자락 깊숙이 자리를 잡았다. 1671년 황응청과 황여일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창건됐다. 황응청은 황여일의 스승이며 숙부다. 1776년 해월 문집이 이곳에서 간행됐다. 문집은 대산 이상정이 최종 편집원고를 교감했고 서문까지 집필했다. 대원군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폐됐다가 1881년 강학소가 건립됐고 1983년 사당과 강당을 복원했다.
 

남사고 생가지의 수남정사. 정사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은 황여일의 시다.

격암(格庵) 남사고(南師古) 유적지는 울진군 근남면 수곡리 왕피천 앞에 있다. 남사고의 생가터와 박물관 등이 있다. 생가터의 수남정사(水南精舍) 주련에 걸린 7언율시가 황여일의 작품이다. 남사고는 황여일의 아버지 황응정, 숙부 황응청과 친분이 깊었다. 황여일의 시는 어릴 때 남사고를 만났던 기억을 회고하는 내용을 풀어썼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사진=김동완 작가·한국국학진흥원 집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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