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 탈출 뒤 다시 의병활동…임금 호종하며 전공 세워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절개산.이곳에서 임란때 전투가 벌어져 평창군수 권두문이 포로로 잡혔다.

△평창군수 부임 한달 만에 맞은 임진왜란

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1592년 8월 7일 대관령을 넘어 오리라 예상했던 왜군은 삼척을 지나 정선 백복령을 넘어 평창으로 진입했다. 9일, 왜군은 전투에 앞서 사자를 보내 항복을 종용했다. 편지를 들고 온 사자는 조선인이었는데 왜군에 붙은 자였다. 권두문은 사자를 크게 꾸짖은 뒤 목을 치고 항전의 기치를 높였다. 그리고 조국산하를 침탈한 적과는 어떤 협상도 없음을 선포했다.

평창군수 권두문(權斗文,1543~1617)은 여기가 죽을 자리라고 생각했다. 3월에 부임해 아무런 준비도 없이 한달 만에 맞은 전쟁이었다. 2000명이니, 4000명이니 도대체 진위를 알 수 없는 소문이 무성했다. 적에 비해 권두문이 지휘하는 군사는 한 줌에 불과했다. 중과부적에 최첨단 무기인 조총을 상대할 무기도 변변치 않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조선의 관리로서, 의리를 익힌 선비로서 왕과 국가를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바친다면 그것도 영광스러운 일이 아닌가, 라고 생각했다. 권두문은 병력을 노산성에 집결시켰다. 노산은 평창의 진산으로 해발 419m에 불과했지만 삼면을 평창강이 둘러싸고 있는데다 북쪽은 가파른 절벽이 서있어 천험의 요새였다. 이 때문에 신라 고려 조선을 거치는 동안 평창을 지키는 외성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노산성 전투와 관련‘ 『평창읍지』는 노산성에서 왜군과의 전투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권두문이 쓴 전쟁일기 ‘호구일록(虎口日錄)’은 노산성 전투에 대한 언급이 없어 노산성 전투가 실제 이뤄졌는지는 의문이다. ‘호구일록’은 1592년 8월7일부터 9월13일까지 평창에서 벌어진 왜군과의 전투, 포로로 잡혀 끌려다니며 고초를 겪은 상황, 탈출해 고향으로 돌아가기까지 과정을 상세하게 적은 기록이다.
 

강원도 평창군 노산성에 있는 임란노성전전비

△응암굴 전투에서 아들과 함께 포로가 되다

11일, 적들은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권두문은 노산성에서 물러나 정동굴(응암굴)을 최후의 방어진지로 구축했다.정동굴은 현재의 매화마을 앞에 있는 동굴이다. 평창강 가파른 절벽 위 나무숲에 가려진 동굴로 위 아래 두 개의 동굴이 있어서 은신하기에 좋았다. 아래쪽은 민간인 가족을, 위쪽은 관군이 집결시켰다. 권두문은 여기에 은신하면서 게릴라전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두 개의 굴은 매를 이용해 연락했는데 매가 왜군에게 발각되면서 은신처가 드러났다. 절벽을 기어오르는 왜군을 향해 활을 쏘고 돌을 굴리며 항전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8~9차례 전투 끝에 왜군에게 동굴을 내주고 말았다.권두문은 끝까지 저항하다가 왜군의 칼에 팔이 베이고 발목이 부러져 포로로 잡혔다. 아들 주도 함께 포로가 됐다. 권두문의 부실副室인 강씨는 왜군에게 몸이 더럽힐 수 없다며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자결했다. 강씨가 몸을 던진 절벽을 ‘절개산’, 매로 교신한 동굴을‘응암굴’이라 불렀다.

권두문 역시 자결하려고 칼을 빼 들었으나 아들 주가 울면서 칼을 든 손을 잡고 말리는 바람에 실패했다. 권두문은 이후 세 차례 더 자살을 시도했으나 그때마다 아들 주가 나서서 말리는 바람에 실패했다. 권두문은 왜군의 이동로를 따라 약수역 영월 노산묘 제천 주천 빙허루 등으로 끌려 다녔다. 가장 괴로운 일은 왜군의 선무공작에 백성들이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었다. 왜장 모리 요시나리가 강원도 감사를 자청하며 백성들에게 선심을 펼쳤다. 그러자 자신의 수하에 있던 평창관아의 서리나 노비들이 머리를 깎고 일본복장을 했다. 왜군이 이동할 때 짐을 지고 부역을 한 사람의 반 수 이상이 조선인이었다.

권두문을 괴롭힌 것은 또 있었다. 밤마다 자행되는 왜군들의 무자비한 성폭력이었다. 왜군들은 밤마다 조선의 여성들을 범했고 피해여성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밤새도록 구금된 자신의 귀에 들려왔다. 권두문은 오직 죽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권두문은 포로로 잡혀 지내는 동안에도 목숨을 건 모험을 시도했다. 왜군의 행군루트, 방어진지구축 방법 등을 눈여겨 보았다가 편지를 써 호소사와 관찰사 그리고 조방장에게 보냈다. 권두문이 구술하고 사산감역 이사악의 아들 경진이 받아썼다. 이글은 ‘호구일기’에 실리지 않고 ‘남천선생문집’「호소사 관찰사 조방장에게 올리는 글」에 실려 있다. 이 편지는 석방되는 조선인, 왜군의 심부름을 하는 서리 등을 통해 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주시 영주동 반구정앞 구호서당구지표지석. 권두문을 배향하는 구호서원이 있던 자리

△영화 ‘대탈주’의 조선판 버전, 지붕 뚫고 탈출

9월2일 밤, 천둥이 치고 소나기가 쏟아졌다. 사방이 깜깜해 지척을 분별할 수 없었다. 권두문을 지키던 왜군 2명이 자기들끼리 뭐라고 지껄이면서 권두문의 결박상태를 살피더니 등을 들고 가버렸다. 다른 녀석들은 모두 잠들었다. 권두문과 아들 주는 결박을 풀고 탈출했다. 권두문은 발목을 다쳐 걷기가 어려웠지만 탈출을 결행했다. 가다가 잡히게 되면 그 자리에서 자결할 생각이었다. 이미 네 번이나 자결을 시도했으나 그때마다 아들 주가 막았기 때문에 죽지 못했던 그다. 조선의 관리로서 나라를 구하는 일을 하지 못했으면 죽음으로서 의리를 실천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살아있는 것이 오히려 능멸에 가깝다고 그는 생각했다. ‘호구일록’에 기록된 탈출 장면은 1963년 개봉한 스티브 맥퀸, 찰슨 브론슨 주연의 영화 ‘대탈주’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고 감동적이다. ‘대탈주’는 독일군 포로수용소에 수용돼 있는 연합군 포로의 탈출을 그린 명화다.


“벽에 구멍을 뚫고 나가 긴 마루를 지나 성주 기둥을 타고 천정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까치구멍을 통해 지붕으로 나왔다. 기왓장을 몇 장 걷어내고 우리를 결박했던 줄을 풀어 그 줄을 타고 내려갈 수 있도록 묶었다. 흙이 떨어지는 소리가 약간 났으나 빗소리와 천둥소리 때문에 적들이 듣지 못한 모양이다. 나는 지붕의 기왓장을 밟고 줄을 타고 내려와 문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아프던 발도 가벼워져 아픈 줄을 몰랐다. 동쪽 벽에 붙어서 살펴보니 아들 주가 따라온다. 무사히 내려왔다. 서로 손을 잡고 대문 밖을 나오니 그 때 부자의 정을 형언할 수 없었다.”- 「호구일록」 9월 2일자 기록


권두문 일행은 주천 빙허루에서 탈출한 뒤 원주 단구와 신림, 약수역을 거쳐 평창으로 돌아왔다. 약수 노래재에 도착했을 때 권두문을 깜짝 놀라 눈을 비볐다. 김사경 나사언 이경주 등을 비롯한 평창군민들이 포로로 잡혀간 군수가 돌아온다고 마중을 나왔다. 이상림은 술을 따르며 위로 했다. 마중 나온 군민들이 박수를 치고 만세를 부르고 노래를 불렀다. 통곡하는 사람도 있었다. 고개아래 아득하게 펼쳐지는 평창군 마을을 내려다 보며 권두문도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이때부터 이 고개를 ‘노래재’라고 불렀다. 시간이 지나면서 와전돼 ‘모래재’라고도 한다.

평창군수에서 체직된 권두문은 영월과 봉화를 거쳐 고향 영주로 돌아왔다, 영주에서 안집사 김륵을 도와 의병활동을 펼쳤다. 주로 의병부대의 군량을 확보하고 보급하는 역할이었다. 1593년 권두문은 의주 행재소로 가서 포로로 잡혀서 겪고 보았던 왜군의 전술, 강점과 문제점 등을 분석한 시무책을 올렸다. 선조가 가납한 후 봉상시주부에 제수하였다. 선조를 호가하여 한양으로 돌아온 후에는 군자감첨정 예천군수, 통례원좌통례를 지냈다.

영주시 영주동에 있는 강소사 정려비

△권주문의 유적지

권두문은 영주사람이다. 자는 경앙景仰 호는 남천南川이다. 퇴계 이황의 제자인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문하에서 배웠다. 영주 구호서원(鷗湖書院)에 추향됐다. 문집으로 ‘남천선생문집’이 전한다.‘호구일록’은 남천집의 권2에 실려 있다.

절개산 강변에 강소사의 절개를 기리는 목재 시비가 서 있다.

권두문의 유적지로는 평창 노산성의 ‘임진노성전적비’가 있다.평창군은 1982년 노성전적비를 세우고 군민의 날인 10월 7일에 노성제를 지낸다. 전투가 벌어졌던 평창군 절개산 아래 강변에는 절벽에서 몸을 던져 자결한 권두문의 부실副室 ‘강소사 시비’가 있다. 영주시 영주동 구성공원 아래 반구정 앞에 ‘구호서당구지(鷗湖書堂舊址)’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구호서원은 권정과 권두문 김대현 김영조 권창진 등을 배향했으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복설 되지 못했다. 표지석이 권두문의 유적지다. 반구정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권두문의 부실 강소사의 정려비가 있다. 권두문의 묘소는 봉화군 봉화읍 문단리 방현에 있다.

글·사진=김동완 작가·한국국학진흥원 집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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