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농촌에 두 농부가 땅을 나누어 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이 두 농부의 논(畓)에는 워낙 잡초가 많아서 모두 뽑아 낼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한 사람은 이를 참다못해 벼와 잡초를 한꺼번에 베어내고 그 자리에 불을 질러 태워 버렸다. 그러자 벼는 죽고 잡초만 되살아났다. 또 다른 한 농부는 참다못해 잡초 뽑기를 포기하고 벼와 잡초를 모두 그대로 방치했다. 그러자 벼는 쭉정이로 변하고 잡초는 무성해졌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굶어죽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잡초가 많다고 해서 벼와 잡초를 함께 태워버린 사람이나 잡초 뽑기를 아예 포기한 사람 모두 굶어죽게 된 것은 모두가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끔 극단적인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우 극단적이지 않은 의견은 마치 용기가 없거나 심지어 진실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치부하고 만다. 그러나 극단적인 방법은 언제나 극단적인 모순을 낳는다. 극단적인 것은 언제나 다른 무엇인가를 포기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조금은 답답하더라도 참는 것이 옳다.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물 한방울 나지 않는 사막에도 ‘포아’라는 풀이 산다. 이 풀은 5센티미터의 길이로 산다. 그러나 이 짧은 길이를 유지하기 위해 땅 밑으로 600킬로미터 길이의 뿌리를 뻗어 있다고 한다. ‘포아’라는 풀의 강인한 생명력이 우리에게 교훈으로 다가온다.
최근 노사분규가 심각해지면서 기업인들이 외국으로 보따리를 옮기겠다는 말들이 나오고 외국인 투자가 줄어드는 등 설상가상이다. 지역 기업들도 투자를 꺼리면서 불황이 겹치기로 더해가고 있다. 하루가 멀다하고 노사분규가 이어지는 대한민국에서 기업을 하고 싶은 사람은 어쩌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해외로 보따리를 옮기겠다는 발상 또한 극단적인 발상이다. 어렵고 힘들고 답답하지만 참는 것도 경영이다.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회사를 문닫아 버린 뒤 가진 돈만 쓰더라도 평생동안 잘먹고 잘 살수 있는 기업가들이 많다. 하지만 그같은 극단적인 방법은 삶의 가치를 거부하는 일이다. 더불어 사는 삶의 맛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오죽하면 그럴까마는 극단적인 처방은 극단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꾸준히 연구하고 노력하는 가운데 위기를 극복하는 경우도 우리주위에 흔치않게 볼수 있다. 어렵고 힘들게 기업을 운영해온 지역의 레이싱 게임 전문업체인 주식회사 KOG 이종원사장의 경우 세계적인 게임 유통사인 XS게임즈와 판매 계약을 체결해 수백만 달러를 거머쥐게 됐다는 뉴스가 신선하게 느껴진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고국에서, 그것도 향토에서 벤처기업을 하겠다고 대구디지털산업진흥원에 입주해 있는 이사장의 이같은 개가는 일대사건이다. 사막에서 살고 있는 ‘포아’ 풀 같다는 표현과 어울린다. 극단적이지 않고 서서히 그리고 조용하게 미래를 향한 이사장의 걸음걸이가 파업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경제계에 한줄기 빛으로 작용했으면 좋겠다.
이같은 기업가들이 있는 반면 줄 파업이 벌어지고 있는 노사현장의 모습은 안타깝기만 하다. 상황이 다르고 기업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파업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사업장의 현실을 바라보면 가히 숨이 막힐 지경이다.
차제에 근로자들은 자제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때다. 대구지하철 노조파업이 9시간만에 극적으로 타결된 것도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파업을 풀고 직장으로 돌아온 노조나 극단적인 상황에서 지혜를 발휘한 사(使)측의 노력이 돋보인다.
우리는 노사분규로 회사 문을 닫고 길거리로 나서는 기업가를 숱하게 보아 왔다. 스스로 아끼고 가꾸고 사랑했던 회사를 발로차고 때려부수고 거리투쟁을 벌이다가 보따리를 사고마는 근로자가 졸지에 실업자 신세로 변한 경우도 흔히 보았다. 대화로 문제를 풀어내는 기업은 노사(勞使)가 모두 성공한 케이스다. 아름다운 노사문화가 하루빨리 정착되기를 바란다. 극단적인 방법 말고도 살길은 얼마든지 있다.
한 국 선<편집부국장 >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